그날은 모든 게 쉬웠다. 컨디션이 좋다는 말은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퍼트를 보면 라인을 완벽하게 읽어내고, 클럽 역시 최적의 선택으로 일관한다. 눈을 감고 스윙을 해도 공은 아주 똑바로 날아간다. 페어웨이는 활주로처럼 보이고 홀은 맨홀 뚜껑만큼 커 보인다.
위의 말은 LPGA에서 통산 72승을 거둔 골프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이 자신이 2006년 레지스터 핑 대회에서 골퍼들의 ‘꿈의 타수’인 59타를 기록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크레이지 모드'와 비슷한 상황이다. 크레이지 모드란 스포츠나 게임에서 누군가 다른 때와는 다른 이상한 활약이나 행동을 보일 때 쓰는 말이다.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만 되면 야구 해설자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는 “단기전에서는 미친 선수가 나와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하겠다.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최상의 운동 수행(peak performance), 줄여서 최상 수행이라 부른다. 최상 수행은 선수가 심리적, 신체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자신의 기량을 예외적이고 초월적으로 발휘하는 순간을 말한다. 최상 수행을 성취하고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운동선수와 코치, 그리고 스포츠 심리학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상 수행이 선수와 코치들이 그렇게 바라는 바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최상 수행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매우 일시적으로 발생한다.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최상 수행을 경험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최상 수행이 일어나는 동안 경험한 심리적 특징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그 결과 최상 수행의 몇 가지 공통적인 심리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심리 기술 훈련에서 어떤 것들을 다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골프에서도 1991년 미국의 스포츠 심리학자인 패트릭 콘이 19명의 프로 및 대학 골프선수들을 대상으로 골프 상황에서의 최상 수행 순간에 경험하는 심리적 특성을 연구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골프 최상수행 때는 다음과 같은 심리적 특성이 있다.
첫째, 최상 수행에서 선수들은 아주 좁은 범위로 주의를 기울였다. 즉, 여러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주의의 대상을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스에서 너무 많은 곳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어 샷에 몰입하기를 원한다면 주의의 대상을 가급적 적은 수로 한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코스에 들어서면 그냥 공을 보고, 목표를 보고 스윙하는 습관을 들이자.
둘째, 최상 수행이 일어나는 동안은 현재 순간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즉, 최상 수행은 한마디로 완전한 몰입 상태에 이르러야만 달성 가능한 것이다. 최상 수행이 일어난 라운드는 무아지경으로 그 라운드를 돌게 되어, 최고의 집중력으로 수행할 과제에만 전념하고 자신의 신체적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게 된다. 간혹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라운드가 지나갔는데 끝나고 보니 최고 스코어를 기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라운드가 바로 최상 수행이 일어난 라운드다.
셋째, 최상 수행의 순간에는 일체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스윙에 방해가 되므로 경기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최상 수행이 일어나는 동안은 두려움이란 놈이 뚫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자동적으로 플레이가 이루어진다. 즉,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페이드를 생각하면 페이드가 되고, 드로를 생각하면 드로가 된다. 스윙은 자동적이며, 간단하고, 쉽게 이루어지는 느낌이 든다. 또 클럽이 마치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며,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반응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두려움이 일어날 여지는 없을 것이다.
넷째, 최상 수행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이완된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편안함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경쟁 상황에서의 긴장을 해소시켜 주기 때문에 이완은 최상 수행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움직임은 뼈에 붙어있는 근육 중 그 운동에 동원되는 근육이 수축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근육은 수축만 할 줄 알기 때문에 최상 수행에 이르려면 수행 직전에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있어야 한다. 스윙 시 뒤땅을 치거나, 스윙이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스윙 전 준비과정에서 근육이 충분히 이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다섯째, 최상 수행 때는 내 마음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이 가능하다. 플레이가 아주 잘 될 때는 두려움이나 인내심은 물론 자신감도 스스로 컨트롤할 수가 있다. 샷을 서두를 필요도 없고, 좋은 경기 감각과 리듬을 찾을 수 있다. 자연히 결과에 대해서 걱정도 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스스로 통제가 잘 되지 않을 때는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게 되고, 동반자의 행동은 물론 캐디까지 신경을 건드리게 된다. 골프 경기는 골퍼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날의 날씨, 동반자, 코스 상태, 운 등이다. 하지만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본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미스 샷이 나거나, 잘 치고도 코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디봇에 들어갈 경우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더라도 곧바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자기 조절이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바람직한 생각을 머릿속에 넣는 일이다. 최상 수행을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최상 수행을 경험한 선수들은 그 경기에서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경기를 앞둔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공식처럼 하는 “오늘 경기를 즐기겠습니다.”는 말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는 잘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골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전장과 같은 토너먼트의 열기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승리할 수는 없지만,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정말 즐거워야 만이 최상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