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잠JA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요일 Sep 21. 2023

잠(JAM)14

SF 장편소설

14.시작의 종말


- 저기….


쓰러져 있던 남자가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다리를 보니 상처는 잘 치료가 되어 움직임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나온 남자가 식탁에 앉아있던 이룬을 발견했다. 다가와 불러보았지만 이룬이 대답하지 않자 어깨를 툭 치며 불렀다.


- 저기요?


그때 이룬이 풀썩 쓰러졌다.


- 어? 이봐요?


* * *


- 괜찮아요?


이룬의 머리에 적신 수건을 얹던 그가 이룬이 눈을 뜨자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괜찮다. 무엇이 괜찮은 걸까. 아빠 엄마 찰리… 갑자기 가족을 모두 잃게 된 이룬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생각하던 이룬이 그에게 처음 한 말도 같았다.


- 아, 당신… 괜찮아요?


이룬의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적신 천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촉촉한 물기가 이룬의 입술을 가만히 적셨다. 이룬이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남자가 일어나기 쉽도록 몸을 받쳐주었다.


- 신연방에서 다녀갔어요.


주방에 나가 의자에 앉은 이룬에게 남자가 말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기의 로봇이 보였다. 신연방에서 연락이 왔었다. 자기 폭풍에 희생된 아빠 엄마를 애도하며 신연방 기금에서 보상금이 바우처로 지급될 거라는 것과 지금의 집에 그대로 살 것인지 이주를 원하는지 등을 물었다. 아빠 엄마와 찰리와 함께했던 곳을 떠나기가 싫어 그대로 살겠다고 하자 신연방 자산으로 희생된 가족의 노동력을 대체할 13타입 패밀리 로봇 두 기를 지원해줄 거라고 말했다.


두 패밀리 로봇에게 아빠 이름 진과 엄마 이름 마리에를 붙여준 이룬이 진은 목장 일과 키퍼 및 가드 역할을, 마리에는 집안일과 목장 전반의 관리 역할을 지정해주었다. 진과 마리에는 신연방에서 목장에 관련된 프로토콜을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도착했기에 처음부터 오래 해온 것처럼 익숙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두 패밀리 로봇에겐 이미 목장의 지형과 건물, 내부 구조 등이 사전 입력되어 있어 물건 하나의 위치는 물론 창고들과 비품, 양들의 숫자나 상태까지 원래 같이 살아온 것처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룬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생산성을 유지하려는 신연방의 정책 때문이었다.


- 이름이 뭐예요?


아, 혹시 커피가 있나요? 이름을 묻는 말에 커피를 찾는 남자에게 마리에가 자신이 만들겠다고 했다. 남자가 고맙다고 하고 이룬에게도 마시겠냐고 물었다. 좋다고 이룬이 말하자 마리에에게 두 잔 부탁해요. 라고 했다. 커피를 앞에 두고 남자는 자신의 이름은 이기주인 것 같은데 이름을 빼고는 나이나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찰리의 스캔 상으로는 허벅지의 물린 상처 외에 다른 곳의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 하던 이룬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순간 다시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신을 기주라고 말한 남자는 이룬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 아빠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 아…. 그래서 그랬군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잠깐씩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을 돌봐주던 분이 계셨다고 기억했다.


- 엄마였어요.


기준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어디 갈 데는 있어요?

- 그것도 모르겠어요.

- 괜찮으면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머물러도 돼요.

- 고마워요. 그럴게요.


기주… 이룬이 그 이름을 입속에서 불러보았다.


* * *


기주는 목장 일에 금세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룬이 보기에는 이런 일을 전혀 해보지 않은 손이라 처음엔 매우 어설펐다. 양들을 엉뚱한 곳으로 몰거나 다른 사료를 보급하기도 했는데 기주의 주변엔 진이 붙어서 기주의 어설픈 콘트롤을 보조했다. 이룬과 기주가 함께 생활한 지도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사이에 둘 사이는 무척 가까워져 같이 식사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식사하며 영상을 시청할 수 있도록 마리에가 커다란 가상 스크린을 식탁 앞에 띄우고 주변에서 서빙을 한다거나 차를 끓이는 등 두 사람을 위한 서비스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스크린에 행성 관련 뉴스가 지나갔다.


3커뮤니티 부근 어딘가에서 행성 바이러스로 인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뉴스. 하이에나가 출몰하는 지역인 22커뮤니티와 27커뮤니티에서 하이에나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신연방에서 충분한 보상이 주어져 유족들 생활이 전보다 풍요로워졌다는 등, 하지만 생명은 소중하니 대비를 잘해야 한다는 당부. 그리고 자기 폭풍에 관한 뉴스.


이 뉴스가 나올 때는 마리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뉴스에 집중했다. 이룬의 슬픈 감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기주는 그런 이룬과 마리에 사이에서 묵묵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다시 스크린으로 가져갔다. 뉴스가 지나고 광고가 시작되었다. 광고에서 APS라는 기업이 부유 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기 폭풍, 하이에나, 중력계 질환, 바이러스 확진,

부유 돔엔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안전한가요?

부유 돔은 인간에게 딱 맞는 중력이 가동됩니다.

이제 소개하는 바다 뷰

CT 12-A 구역의 커뮤니티를 주목하세요.

당신이 가진 것들로 당신을 누리세요.

시간은 눌리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APS를 만나세요.


영상에서는 아름다운 수평선 뷰에 태양이 지고 세 개의 달이 뜨는 모습 사이로 건물 지어지는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찰랑거리는 파도가 지나가고 낭만적인 삶을 누리는 모습과 APS의 기업 로고, 라이크 어스라는 슬로건도 지나갔다.


- 라이크 어스….


기주는 자기도 모르게 슬로건을 중얼거렸다. 그런 기주를 보며 이룬이 물었다.


- 기주. 부유 돔에서 살고 싶어요?

- 아, 아니에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서.

- 아, 어쩌면 부유 돔에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기주가 이룬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이룬이 마리에에게 스크린 오프를 지시하고 앞에 놓인 잔과 디저트 접시를 들고 일어날 때 기주도 마침 잔을 들고 일어서다가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서게 되었다.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당황하는 이룬을 보니 문득 기주는 이룬이 무척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이룬의 눈을 바라보며 기주가 말했다.


- 이룬, 키스해도 될까요?


이룬이 기주를 보았다. 그 눈에 담긴 기주는 하얗던 얼굴이 적당히 그을려 보기 좋은 빛으로 황금빛 눈동자 안에 이룬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을 기다리는 태양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이룬이 자신도 모르게 기주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보드랍고 따뜻해서 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주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 감지 말아요.


이룬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기주는 가만히 이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당신이 눈을 감으면 세상이 온통 어두워질 것 같아.


이룬이 눈을 뜨고 말했다. 기주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이룬, 저는 아마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룬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주가 다시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할 때 이룬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막고 말하지 말아요. 라고 했다. 기주는 가볍게 웃으며 하지 말라는 게 많군요. 하고 이룬을 가볍게 안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이룬은 곁에서 잠들어 있는 기주를 보았다. 함께 지내온 모든 순간이 영상이 되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기주는 심성이 착하고 겉으로는 단단한 남자였다.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 과거에서도 그는 역시 그랬을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 이룬이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자기 폭풍에 부모님을 빼앗기고 처음. 이룬은 다시 잘살아 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 일어났어요?


눈을 뜬 기주가 이룬을 보고 싱긋 웃었다.


- 머리 아픈 데는 괜찮아요?

- 괜찮아요. 생각보다 머리가 단단한가 봐요.


기주의 말에 이룬이 활짝 웃었다. 그런 이룬을 보며 기주도 같이 웃는다. 마리에가 커피와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좋은 꿈 꾸셨나요? 이룬님 기주님.


트레이를 침대에 내려놓은 마리에가 기주에게 다가가 머리를 보여달라고 했다. 기주의 뒷머리에 작은 상처가 보였다. 지난밤에 기주는 이룬에게 밀려 침대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부딪쳐 기절했었다. 기주는 잠깐 충격을 받은 거라고 했지만 이룬이 부르는 소리에 달려온 마리에의 스캔으로는 기주가 기절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기주는 머리를 부딪쳐 충격을 느끼면서 뭔가 아련하게 떠오르다가 마리에의 스캔과 응급처치에 정신을 차렸다. 잠깐이지만 기주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눈앞에 있는 걸 보았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 층 높이나 되는 거대한 공간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설득하려고 하는 모습도 있었다. 과거에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는데 금세 사라져서 아쉬웠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룬을 보며 곧 마주 웃어주었다.


* * *


도끼로 장작을 패던 기주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눈을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룬이 그런 기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기주가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뭔가가 이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룬은 기주가 다른 곳을 보자 같이 눈을 돌리고는 곧 눈동자에 당황과 공포의 감정을 가득 담았다.


- 이룬! 달려요! 어서!


기주가 도끼를 들고 이룬 쪽으로 맹렬히 달려갔다. 이룬은 기주를 향해 모든 힘을 이끌어 내달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잠(JAM)1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