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이야기- 광고와 방송 이야기
1999년 3월, 나는 팔자에도 없는(?) 000 방송국에 계약직으로 취업을 하게 된다.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대학생활을 갑작스럽게 휴학을 하게 된 것도 사실 방송국 취업이 계기였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광고학과도 없었던 곳에서 혼자서 광고 동아리를 만들었고 당시 그 모임의 정체성은 新(새로울 신) 김치였다. 매운 신라면의 신이 아닌 새로울 신. 항상 어딜 가나 새로움, 번뜩이는 아이디어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대략 5-6명의 비전공자들이 모여서 모임은 형성이 되었지만 우리는 결국 비전공자였기에 처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오늘의 스토리는 방송국을 들어가기 전 벌어진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일단 광고공모전을 합시다"
광고에 대해서 아는 바라고는 광고는 너무나 신선하며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라는 것, 그리고 항상 기억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광고의 3대 요소가 무엇인지 광고는 어떤 정의를 가졌는지 전혀 몰랐다.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은 속도가 느렸고 익스플로러로 대단한 검색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도서관이 있었고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이런저런 광고책을 도서관에 넣어 달라고 문의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내가 벌인 일이었기에 총대를 메었고 동아리 장을 맡았다.
학과 수업이 마치면 빈 강의실에 모여서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광고공모전 정보를 모았고 어떤 이는 신문지를 그대로 찢어서 가져오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자세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당시에 항상 해야만 하는 과제와도 같은 공모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조선일보 공익 공모전이었다. 나의 이름을 뜻풀이를 하면 '항상 법을 지키라'는 의미였으니 공익은 왠지 친근하고 편안했다. 왠지 따놓은 당상인 것 같은 그런 느낌. 우리는 그렇게 몇 달을 공모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비전공자여서 그랬는지, 내 리더십이 부족했는지 점점 수다를 떠는 모임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공모전을 따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한번 눈에 꽂히면 일단 하고 보는 성향을 갖고 있다. 팀을 이끄는 동아리 장이었지만 초기에 이 팀은 공모전에 참여 의사가 미약했음을 미리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3년의 실패, 연합동아리 결성"
학교 동아리는 8개월 정도를 지속하다가 막을 내렸고 나는 개인으로서 작업을 하는 예비 광고인이 되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글을 잘 쓰는 국문학과 친구에게 카피를 맡겼고 나는 전체 기획과 콘셉트를 잡는 역할을 맡았다. 고향 본가에는 내 작품의 일부가 남아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버려졌을 것이다. 나는 3년을 그렇게 공모전에 도전을 했고 모두 떨어졌다. 거의 매일을 밤을 새우고 프린트를 하고 출품을 하고 경험을 위해서 일부러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작품을 출품했다. 서울로 올라와 출품을 할 때 타 대학교 팀들의 기세에 나는 완전히 눌려 버렸다. 외모부터 범상치 않았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남달랐다. 그래서 나는 홍익대학교 게시판에 글을 써서 연합팀을 만들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지방과 서울의 격차를 줄이고 싶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고 공모전에 임했다. 아쉽게도 떨어졌다. 자신감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당시에 내가 만든 작품은 사실 콘셉트와 내용으로 따지면 대상을 받은 작품과 같은 콘셉트이었다. 그러니까 인터넷은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도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료의 비주얼보다 더 과감하다고 생각한 교통사고 표지판의 숫자를 이용해서 표현을 했는데 나중에 선정된 대상 작품은 마우스를 이용해서 조금 더 감각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당시의 아쉬움을 표현하라면 그냥 울고 싶어질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 비주얼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었어야 했다는 안타까움과 왜 내 고집을 피웠을까에 대한 후회가 여느 때 보다 컸다. 그 이후로 그 팀은 해체가 되었다. 공모전이 끝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몇 년을 이어가다가 나의 방송국 취업고 동시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나의 빈약한 자존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내가 연락을 하지 않아도 연결이 될 정도였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다.
"취업은 뒷전이었던 나, 결국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찾다"
내 인생 마지막 광고공모전은 조선일보 공익광고 공모전이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광고학과가 아니다 보니 매번 출품에 맞아야 하는 기본 조건을 몰라서 낙오가 된 케이스가 많았으며, 때로는 비주얼의 표현이 나의 스타일을 고집을 하다 보니 낙방을 하게 된 사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기는 했다.
카피를 담당했던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학과 수업에서 우리의 작품을 교수에게 보여주었는데 광고학 교수는 우리의 작품을 굉장히 칭찬을 많이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굉장히 독창적이고 비주얼의 선택이 대학생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비전공자로서 광고공모전을 3년을 진행했고 모두 낙방했지만 광고학 교수에게서 받은 직접적인 피드백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제야 알았다. 누군가가 나의 아이디어와 표현을 알아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아름다운 일인지, 그리고 내게 어떤 힘을 주는지를 말이다. 자신감은 이내 회복이 되었지만 더 이상 광고공모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열정도 열정이지만 작품을 준비하는데 돈이 꽤 들었다. 게다가 내 아버지는 자연계열을 담당하는 교수였기에 내가 창작활동을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다.
항상 광고책을 뒤적이며 밤을 새웠고 아니면 밖을 나가서 커피숍에서 광고 아이디어를 짜기 위해서 그야말로 고향 본가는 내게는 모텔과도 같은 성격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에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발생한 것이다.
"너. 흰개미 연구팀에 들어오지 않을래?"
대학교의 자연계열 교수님이 내게 던진 말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와 같은 학과 출신이었기에 나는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교수님이었고 그는 항상 학생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만큼 격이 없는 분이어서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누는 사이였다. 그는 국내 유일한 흰개미에 대한 전문가였다. 당시 흰개미의 존재는 희미했는데 알고 보니까 국내 문화재를 갉아먹는(?) 다는 점에서 피해가 컸던 모양이었다. 나는 대학교에서 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항상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박 교수님의 제안은 솔깃했다. 단백질 덩어리인 흰개미, 사람을 물지도 않는 객체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학과 수업이 끝나면 나는 그의 연구실로 갔고 거기서 연구실 다운 분위기, 열정을 가진 선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관계도 있다. 그러다 곧 일이 터졌다.
"부산 KBS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단다 야... 네가 좀 시나리오를 써라!"
교수님이 점심에 밥 먹다가 던진 말이었다. 나는 시나리오의 '시'자도 모르는 학생이었고 고작 해본 것이라고는 광고 출품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연구팀에는 미디어에 가까운 이는 정작 나 밖에 없었다. 지나고 보면 웃긴 일이고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교수님은 저녁밥을 먹고 나를 연구실에 앉혀 놓고 자신의 포부와 프로그램이 어떤 방향이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게 갑자기 1.5리터 페트병을 주시고는 연구실 방문을 잠그고 나가버렸다. 졸지에 문을 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경보 해제를 안에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5리터 페트병은 소변을 보라는 용도로 준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고 나는 헛웃음이 나와서 한동안 소파에 앉아서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당시만 하더라도 무척 순진했고 순수했다. 교수가 말한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광고적 요소를 곁들여서 결말을 지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보니까 어설프긴 해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볼 정도의 요약본(시나리오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이 완성이 되었다. 다 쓰고 나니까 아침 8시가 되었다. 나는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교수는 아침 일찍 왔고 내가 던져 놓은 요약본을 책상에서 읽고 있었다.
"야이 놈아!! 너는 천재야...."
교수는 엄청난 목소리로 나를 추켜 세웠다. 밤을 잔뜩 새운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교수는 자기가 썼다면 학술적인 용어로만 기술했을 텐데 나는 전혀 어렵지 않은 말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서 너무 좋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애초에 정식 연구팀원이 아니기에, 흰개미 전공자가 아니기에, 아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나는 광고를 했기에(비록 죄다 떨어졌지만)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표현이 되면 더 비주얼이 좋은지 그 정도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다큐를 누가 볼 것이며, 보다 쉽게 다루고 싶었다. 다큐는 항상 어려운 게 나는 싫었다. 너무 진지한 것도 싫었기 때문에 사실 내가 쓰고 싶은 대로 끄적인 내용일 뿐이었다.
"흰개미의 두 얼굴, 우리 방송합시다!"
부산 KBS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촬영을 들어간다고 했다. 사실 내 학과도 아닌 타 학과의 연구팀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내가 쓴 요약본이 쉽고 정확해서 촬영하기가 수월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기뻤다.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구나 싶어서... 그런데 재미난 일이 터진 것이다. 부산 KBS에서 요약본을 쓴 나를 지목해서 촬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스태프로 가능하냐고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학교에서도 잘 없는 일이다 보니 학장에게 보고를 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우리 학과에서는 좀 기분 나쁠 일이기도 했다. 타 학과의 연구실을 돕겠다는 요청서에 좋아할 교수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나는 당시에 학과에서 장학생이었고 꽤나(?)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무사히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무려 3개월을 다큐멘터리 촬영에 임하게 되었다. 나는 이때 방송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되었고 촬영 기간을 합쳐 6개월이 지나면서 대략의 편집본이 나왔고 방송일자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KBS 환경스페셜에 우리 흰개미를 주제로 한 '어둠 속의 두 얼굴, 흰개미'라는 타이틀로 방송이 되었다. 내 기억에 대략 2000년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 이후, 술자리에서 방송 제안을 받다!"
우리는 최종 방송이 되던 날, 다 같이 모여서 방송을 보았고 부산 KBS 남 PD님은 조용히 우리 학교로 와서 뒤풀이를 해주셨다. 나름 종방연을 한 것이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부터 친해져서 나누지 못했던 말까지... 술잔은 오고 갔고 다들 굉장히 취했었다. 물론 내 경우는 당시에는 주량이 좀 강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기를 반복하다가 남 PD는 교수에게 "000 이 녀석은 연구팀에 있기가 아까워요. 방송 쪽으로 보내세요..."라는 말을 던졌다. 교수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취하셨구나 했다. 하지만 남 PD가 내 옆자리로 와서는 매우 진지하게 말을 던졌다. "내가 방송 짬밥이 15년이 넘는데 너 같은 애들이 방송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가 풍기는 술냄새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내 가슴에 불씨가 살아남을 느꼈다. 활활 타올랐다. 난 그때 알았다. 방송이 내 일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인생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분들의 공감과 댓글은 저에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미천한 글일지라도 여러분의 공감은 저의 짧지 않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봅니다.
덧붙여, 매일 한 시간씩 아침에 일어나서 저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쓰는 즉흥적인 글입니다. 퇴고가 없는 그야말로 즉흥적인 글임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3년의 과정을 통해 깨달은 점
1. 각 분야 전문가, 그의 실력을 믿고 함께 소통하라
2. 인생은 알 수 없다. 전력을 다하되 유연하게 받아들여라
3. 나를 아끼는 타인으로 부터 얻는 조언은 깊이 들여 보아라
4.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