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박하 Feb 04. 2020

6. 당신은 줄곧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간신히 당신이 해 주던 말의 의미를 깨닫고 눈이 짓무르도록 울게 되었다.




매사에 무심한 것 같던 당신은 내 슬픔에도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 어떤 말도 당신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수많은 칼날을 뱉었다. 의도하고 아프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고 이제 와서 변명해본다. 내가 소중한 만큼 아팠을 당신을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 갚아 나갈 수 있을까.




항상 냉정하고 씩씩하던 당신은 내 힘듦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를 다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맞서 싸우고 이겨내라고 말하던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위로가 서툴고 어려웠던 당신은 나를 감싸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뜻하기보단 철저하게 선을 긋는 편이었던 당신이 한 때는 미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를 너무나 아프게 했던 날도 있었다.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상처를 많이 삼켰다. 눈물처럼. 나는 어렸고 어린 나는 당신의 깊음을 알 수 없었다. 그 때의 내 상처들이 결코 얄팍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당신하고 비교할 수 있었을까. 당신도 아픈 사람이었고 힘든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당신은 위로가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위로 받아 본 적 없을 당신은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헤쳐 나오고 이겨 냈을 테니까. 당신은 도망가 본 적 없는 사람이다. 그 어느 때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어 그것을 두고는 차마 못 달아났던 사람이다. 당신에게 보호받기만 했던 나는 어쩌면 달의 한쪽 면만 보고 있는 지구처럼 당신의 한쪽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고 그것은 상당히 성공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강하고, 그 누구보다 존경스럽고, 멋있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당신은 나를 많이 아프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보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이 나를 살게 했다. 당신과 나는 많이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고 나는 지금은 그것을 이해하지만 어린 나는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해 주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곤 했다. 해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곤 했다. 그게 당신을 곤란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당신을 추측할 뿐이다. 당신은 내가 상처받길 원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겠으나 나는 자주 당신의 냉정함에, 차가움에, 논리에 상처 입곤 했다. 당신은 항상 옳은 말을 했고 나는 당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마음으로는 공감하지 못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내가 많이 어렸고, 부족했고, 서툴었다. 지금도 나는 그렇지만.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쉽게 울고 쉽게 지쳤다. 사소한 것에도 금방 상처 받고 포기가 빨랐다. 나는 무력했고 실패했다. 당신의 품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시작한 모든 것들이 다 절망이었다. 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실패. 낙담. 외로움. 모든 부정적인 단어들이 다 나의 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해도 안 풀리고, 새로운 무언가는 낯설기만 해서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뭐든 안될 것 같았고, 간신히 용기 내어 시작한 것은 끝이 안 좋았다. 실패만 거듭하는 것 같았다. 이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다. 망치기만 하고, 망가뜨리기만 했다. 사소한 것들도 커다란 짐이 되었다. 손에 힘이 없는데 들어야 할 것들이 자꾸 늘어났다. 살고 싶어서, 그래도 살고 싶어서 얄팍하게 꾸었던 꿈은 빚이 되어 돌아왔다. 도움이 필요한데,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패한 인생 같았다. 다 망한 것 같았고.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에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은 나에게 고향으로 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그 말이 내 실패를 증명하는 것 같아 싫었다. 여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 나는 고집스레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서 나의 실패담은 늘어만 갔다. 나는 정말 모든 것을 망치는구나. 모든 것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을 때. 다 버리고, 다 놓아버리고 그만 죽고 싶을 때. 몸도 마음도 낡아 버린 것 같았다. 약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고. 한없이 가라앉고만 있었다.




당신을 떠올리면 죄책감만 생겼다.



당신에게 짐이 되고 있는 나를 당신은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당신의 실패이고, 당신을 괴롭히는 악몽이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완벽한 당신의 흠이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이고, 당신의 발목을 옥죄는 짐이다. 언제고 버려질 수 있는 짐이라고, 당신을 힘들게만 하고 괴롭히기만 하고, 도움은 되지 않는 존재라고. 당신은 이런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당신에게 버림받을 날만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에게 미움받아야 마땅한 나였다. 나 같은 게 있어서 당신을 힘들게 했다. 나 같은 게 감히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 나 같은 건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나 같은 건 빨리 죽는 게 당신에게 도움이 될텐데. 내가 빨리 죽어야 당신이 완전히 행복해질텐데. 내가 당신의 유일한 오점이다.


어느 날 나는 당신에게 힘겹게 말을 꺼냈다. 죽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당신이 나에게 사라지라고, 떠나라고, 죽으라고 말하면 좋겠다. 그럼 나는 훌훌 다 버리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위해 나는 이 지친 삶을 그만 두고 떠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나를 짊어지고 살아 온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보은할 수 있는 길이 이것 뿐인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당신의 어깨에서 내려가는 것.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자립하는 것으로 얼른 보은하고 싶었지만 나는 실패했다. 그럴 수 없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익한 일이 사라지는 것 뿐이었다. 내 사랑이, 내 마음이 나보고 빨리 죽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서.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 뿐이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고백한다. 지금도 나는 죽고 싶고, 사라지고 싶고, 내가 당신에게 짐만 되는 것 같아 죄스럽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죄스럽다. 사랑해서 죽고 싶다. 내가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한시라도 바삐 죽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내 존재가 당신을 해치는 것 같다. 존재하는 하루하루가 당신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 같아 나는 힘들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는 당신에게 꽃이고 행복이고 싶었는데, 당신의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는데. 당신을 웃게 만들고, 걱정 없게 만들고, 미래와 앞날을 책임지고 든든한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딸이고 싶었는데. 내가 살아있는 게 당신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것 같아 괴롭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겠지. 나는 매일 생각한다. 내가 빨리 죽는 게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


사랑하는 엄마.


나는 실패한 딸이 아닐까?




https://youtu.be/-iFuDGmYlw4
선우정아 - 도망가자





도망가자.


어디로든 도망가자.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면 그냥 가 보자. 어디로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가자. 다 놓고, 다 버리고 훌훌 털어놓고 벗어놓고 같이 도망가자. 같이 가자.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거, 이고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들 다 놓아두고 버리고 달아나자, 도망가자.



당신은 줄곧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망가자. 같이 가자.



죽지 말고, 너무 죽고 싶을 때 차라리 달아나라고. 어디든 어디로든 같이 가자고. 같이 있자고. 손 잡아 주겠다고. 같이 있자고 당신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것, 입고 있는 것, 하고 있는 것 다 상관 없이 그냥 나만 있으면 된다고. 당신이, 나에게, 도망가자고. 도망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죽지 말고 살아서 도망가자고. 어디든 네가 편한 곳으로 도망가자고. 지금 있는 곳이 행복하지 않으니까, 무겁고 힘드니까 도망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사랑한다고. 같이 있겠다고 당신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도망가자. 그 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줄곧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간신히 깨달았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당신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다시 없을 것임을.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가자. 그 말이 나를 울게 했다. 

새벽 내내 나를 울게 했다.

작가의 이전글 5. 매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결심하고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