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날 거기에 있었어요.
전쟁 같았던 일주일이 지나갔다. 어쩌면 정말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주일이었다. 무엇 하나가 잘못되었다면, 무엇 하나가 운이 좋지 않게 어그러졌었다면, 무엇 하나가 충족되지 못했더라면.
그날 밤 나는 트위터를 통해 비상 계엄 선포 소식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컴퓨터를 통해 관련 소식을 더 찾아볼 수 있었다.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나는 비상 계엄이 무엇인지 검색했다.
국가 비상 사태에 선포되는 것. 비상 계엄과 경비 계엄이 있다는 것. 며칠 전에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나는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종이책으로 사서 읽었다.
나의 고향은 전라북도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먼저 나이를 먹고 서울로 간 사촌 언니들이 무슨 차별을 당하는지 전해 들었고 인터넷을 통해 지역 혐오를 접했다. 고등학생 때 사회 선생님은 우리에게 5.18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날을 알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바로 옆 동네나 다름 없는 곳에서 고독하게 싸웠던 사람들. 애국가를 부르다가 총을 맞은 사람들. 시민을 향해 총을 쏜 군인들. 소년이 온다를 알고 있었지만 이제껏 읽지 못한 이유였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내가 거기 있었던 것도 아닌데 배운 사실과 진실이 너무 끔찍했고 무서워서 책을 읽을 자신이 없었다. 이제야 용기를 내어 읽으면서 나는 여지없이 펑펑 울었다.
나는 비상 계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이 독재와 학살, 탄압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군대가 시민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 사람들이 시위를 하다 죽어 가는 순간. 광주가 떠올랐다. 5.18이 떠올랐다. 죽은 시민들이 줄지어 누워 있던 기억 속의 영상과 소년이 온다가 떠올랐다. 트위터에서는 탱크가, 헬기가 움직인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계엄을 해제하는 방법은 국회에 있었다.
경찰이 국회의 문을 막고 국회의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긴박한 사진과 영상이 올라왔다. 담을 넘어 본의회장으로 들어가는 국회의원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시민에게 국회로 모여 달라고 부탁하는 글이 올라왔다. 나는 집에서 국회까지 걸리는 이동 시간을 찾아보았다. 새벽이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면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단체 채팅방도 온통 혼란이었다. 국회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그러지 말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군대가 국회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안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무언가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가만히 소식만 기다리며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국회에 가겠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어플을 이용해 택시를 불렀다. 한 번은 취소가 되었고, 두 번째로 택시가 잡혔다. 출발할 때 12시쯤 되었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계속 트위터를 들여다보았다. 경찰은 국회의원과 직원에 한정해서 문을 열어 주고 있었고 군인들이 국회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군인들이 국회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때 즈음 국회 근처에 도착했다. 차량이 통제되고 있었다. 택시 기사님이 의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셨다. 이 시간에 여기가 막히는 곳이 아닌데. 머리가 약간 희끗하신 분이었는데, 소식을 모르시는 것 같았다. 나는 말씀드렸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예? 언제요?" "대통령이... 오늘, 아니, 이제 어제구나. 어제 밤 10시 반쯤 계엄령을 선포해서..." 택시 기사님은 말을 잃으셨다.
국회 바로 앞까지 가지는 못하고 근처 사거리에서 내렸다. 인도와 차도가 난간으로 막혀 있어 난간을 넘어서 인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국회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몇몇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나를 잡아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국회로 향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국회 쪽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차량들을 우회시키고 있었다.
국회는 무척 컸다. 나는 서울에 살면서 국회에 가 본 일이 없었다. 국회가 그렇게 크고 넓은지 몰랐고 그렇게 문이 많은지도 몰랐다. 국회 근처, 수소 충전소 근처에서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려는 군인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그 군인이 담을 넘지 못하도록 말리고 있었다. 군인은 커다랗고 무거운 군장을 지고 있었고 헬멧을 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손에 총이 들려 있었던 것 같다. 기억이 혼란스럽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군인의 군장을 잡아당기면서 들어가지 말라고 외쳤다. 담장 안쪽에서 경찰이 화를 냈다.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사람들은 내버려 두지 않았다. 왜 들어가냐고, 들어가지 말라고 끝까지 매달렸다. 결국 군인이 포기하고 다른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몇몇 사람들은 따라갔고, 나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 다른 군인이 들어오려 하는지 걱정하며 서 있었다.
수소 충전소는 입구가 아니었지만 차량이 통과할 수 있도록 넓게 트여 있었다. 그곳을 좌우로 늘어선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군인이 오면 길을 열어 줄 것 같았다. 담장 너머에서 경찰들은 군인이 담을 넘어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사람들은 그것을 뜯어 말렸다. 누군가 손을 잡고 스크럼을 짜자고 말했다. 여자였다. 우리는 바리케이트 뒤에 서 있는 경찰들을 등지고 서로 손을 잡았다. 군인이 오지 못하도록. 군인이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어떤 사람들은 경찰을 향해 욕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경찰을 향해 애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추기거나 말렸다. 모두가 혼란했다. 하지만 모두 그곳에 있었다. 새벽 내내 자리를 지켰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더라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안한 상상.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정문으로 이동했다. 나는 계속 트위터와 유튜브를 확인하며 그곳에 있었다. 정문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가 비면 안될 것 같았다. 언제 군인들이 어떻게 밀고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여차하면 소리라도 질러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테니 나라도,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국회의원들이 본의회장에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고 초조하게 계엄령이 해제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무서웠다. 캄캄한 밤, 춥고 어두운 거리, 한때는 믿음직했지만 지금은 무섭고 밉기까지 한 경찰들, 무서운 군인들, 두 줄로 이동하는 경찰들, 텅 빈 거리, 웅성거리는 사람들, 외치는 사람들. 무서웠다. 춥고, 무서웠고, 피곤했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계속 트위터와 단체 채팅방에 소식을 업로드하며 살아있음을, 무사함을 알렸다. 언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긴장감으로 팽팽해진 정신에 잠도 오지 않았다. 피곤한 줄도 몰랐다. 모든 게 무서웠지만,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군인들이 우리를 지나쳐 국회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총 소리와 비명이 들려올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무서워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안이 가결되었어도 아침까지 그곳에 있어야 했다. 계엄 해제 선포가 늦어지고 있었다. 입장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본의회장, 그러니까, 건물에서 나온 군인들은 계속 국회의 담장 안에 있었다. 나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라도 다시 국회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나와서 떠나는 모습을 볼 때까지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침 그곳에 함께 모인 지인들과 함께 근처의 24시간 식당에서 밥을 먹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 옷을 갈아입고 누적된 피로에 바로 잠들었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때 군인의 군장을 잡아 당기면서 말리던 통에 손에 입었던 상처가 이제 아물어 딱지가 떨어졌다. 들어가지 말라고 목소리 높여 외쳤던 그 순간이 계속 떠오른다.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방패를 앞에 짚고 우리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저 먼 곳을 바라보던 경찰들이 떠오른다. 그렇게까지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옷차림이 단출했다. 그때 뼛속까지 스미던 추위가 떠오른다. 새벽 즈음 바깥으로 나와 주었던, 감사를 전해 주면서 절대로 이 사태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고 약속한 국회의원이 떠오른다. 우리는 체포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또 다른 구호는, 아마 물러나라, 혹은 탄핵하라, 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구호는 아직도,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 둔다. 그날의 불안, 그날의 공포, 그날의 두려움과 그날의 걱정. 그날 떠올랐던 무수한 죽음과...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사실을 통해 매 순간 그날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날이었는지 다시 깨닫는다. 끔찍한 밤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다시 국회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