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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Apr 16. 2024

매년, 이맘때 쯤 비가 온다.

어떤 기억은 너무 아프게 새겨져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른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비가 온다. 처음 몇 해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10년째인 지금 매년 이맘때에는 비가 온다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알고 있다. 왜 비가 올 수밖에 없는지. 왜 이 비를 보며 그 해의 그 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지 알고 있다.







 나는 미신을 믿는다. 타로 카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점 쳐 보기도 하고,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도깨비에게 돌려달라고 빌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귀신을 믿고, 영혼을 믿는다. 윤회와 환생을 믿고, 영적 힘과 믿음의 힘과 말의 힘을 믿는다. 반복되는 말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는 힘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지 몰라도.



 믿고 싶은 만큼 믿으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 이 세상을 떠난 이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나를 지켜 주고 있다고 믿으면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진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어도 고양이 별에서 행복하게, 즐겁게, 이제는 아프지 않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견딜만 하다. 아프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당장 아프더라도, 언젠가는 아프지 않게 될 거라고 믿는다. 계속 아프면 뭐 어때, 아픈 채로 살아도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믿고 싶은 것이 많고, 보고 싶은 것이 많다.



 나는 그들의 슬픔과 상실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다만 잊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학교 근처 카페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던 그 때를. 공부를 하다가 잠깐 쉬기 위해 핸드폰을 봤을 때 떴던 뉴스 속보를. 전원 구조라는 말에 안도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던 그 때를 모두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정정된 소식도.



 선명하다.



 한 순간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죄책감이 너무 커서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억울함에 혹은 슬픔에, 아픔에 아직도 울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렇게 갑자기 없어진다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고통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 고통을 극복하는 것조차 죄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나, 울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잦은 눈물은 헤픈 것일까. 그저 매 순간이 슬플 뿐인데.



 아무리 슬퍼해도 낫지 않는 상처를 우리는 알고 있다. 죄책감. 혼자서는 절대로 이겨낼 수 없는 그 감정은 사람을 너무 쉽게 지옥으로 끌어내린다. 만약에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만약에 그때 다른 생각을 했다면. 만약에 그때, 다른 행동을 했다면. 만약에. 과거를 후회하고, 다른 평행 우주를 생각하고, 그곳에 갈 수 없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지금의 나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평생을 미안함과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내가 감히 돕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아무리 울어도 낫지 않는 상처, 아무리 울어도 씻기지 않는 통증.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냈을 테니까.



 우리는 고통을 알고 있다. 누구나 고통스럽다. 그 자신이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아픈 것을 우리가 감히 나누어 가질 수는 없어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눈 앞이 캄캄하고 세상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이해합니다. 울어도 울어도 시원치 않은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나는 이해합니다. 잠시도 쉴 수 없는 마음을. 잠깐이라도 쉬는 것이 죄가 되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나는 감히 위로할 수 있을까. 감히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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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우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 울 수 있다는 것은, 타인의 아픔에 슬픔에 공감해서 함께 눈물 흘리며 울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각박해진 세상이다. 누구 하나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살기 힘드니까, 내가 견디기 힘드니까, 내가 아프고 힘드니까 타인을 챙길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여기 있어 주어서, 살아 있어 주어서 기쁘다고 생각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견디고 있어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이고 능력이니까. 어른이 되면 눈물이 마른다고도 한다. 잘 울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소리 내어 우는 것이 힘든 사람도 많다. 그러니, 차라리 우는 연습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웃는 연습만큼 우는 연습도 필요하다. 내 안의 묵은 감정을, 쌓이고 쌓여 두텁게 마음을 누르고 있는 감정을 흘려보내야 한다. 무엇이든 안으로 쌓아 삼키는 것보다는 내보내는 것이 좋다. 화를 내는 법을 배우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듯,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울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하늘을 보며 나는 울 수 없는 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울어도 될까. 대신 울어도 될까. 차라리 울고 싶은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플 수 없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라리 덜 아팠으면 좋겠다.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서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해 주는 잠들기 전 기도처럼,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아프면 좋겠다. 간혹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아픔이, 슬픔이, 비극이 우리를 찾아 덮쳐올 때 우리는 함께 울어 주고 함께 아파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아 서로를 이 세상에 붙들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붙들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을 놓아 버리기가 너무 쉬워진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마. 사라진다는 말과 살아진다는 말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살아지자고. 내가 있는 힘껏 살아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살게 되자고. 살아지자고. 살자고 말하고 싶다. 견디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라고 하지 않을게. 울어버리자. 화를 내고 울고 원망하자. 그렇게 있는 힘껏 모든 것을 뱉어내고, 토해내고, 쏟아 버리자. 아무리 게워내도 비워지지 않는 슬픔을 토해내자. 사라지지 않기 위해,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해. 존재했다는 흔적,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 살아있었다는 표시.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되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잊을 수 없는 것과 잊지 않는 것과 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기억한다. 기억은 힘이 세고, 그 누구도 감히 남에게 잊으라고, 그만 지우라고 말할 수 없다. 마음껏 울고 슬퍼하며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프더라도, 그 역시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에. 살아 있기에 우리는 울 수 있고, 소리쳐 외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 이유를, 존재 가치를.



 언제나 슬플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해. 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대신 비가 내린다. 언제나 울고 있는 이들을 이해한다는 듯 비가 내린다. 나는, 기억한다. 10년 전의 그 날을. 그 때를. 그 순간을 기억한다. 사라지지 마, 빗줄기 사이로 손을 뻗어 내밀어 본다.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 중얼거린다. 미안하다고.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기억하겠다고. 



 우리는 아픔을 알고 있으니까. 아픔을 이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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