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한 Jan 26. 2023

연자 이모와 함께 블링블링

*. 이미지 출처: Mnet 방송(https://tv.zum.com/play/1815861)



나의 절친들과 전 남친들만 아는 내 음악 취향, 나는 트로트를 좋아한다.

뽕삘(?) 가득한 나훈아 선생님의 ‘고향역’부터 남진 선생님의 ‘우수’, 여러 가수들이 가요무대나 트로트 경연 대회에서 불렀던 ‘청포도 사랑’ 등등 내가 방에서 이어폰을 꽂고 혼자서만 시원하게 듣는 트로트는 어느새 수십 곡이 넘어가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매일 나에게 비슷한 노래를 찾아주느라 분주하다.


좋은 노래는 연달아서 몇 번을 들어도 역시나 좋다. 그 수많은 노래 중에서 나는 김연자 선생님의 노래들을 가장 아낀다. 영상 속의 김연자 선생님의 눈은 늘 반쯤 웃고 있지만 힘이 있고 마이크로 성량의 완급을 조절하는 팔놀림은 노련하다.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의상을 입고 간주 부분에 한 바퀴 휙 돌고나서 다시 메인 카메라와 눈을 맞추고 2절을 시작할 때는 카리스마도 있다. 내게 그런 이모는 없지만(물론 지금 이모들도 소중하지만), 나는 속으로는 김연자 선생님을 연자 이모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가깝게 불러야 내가 연자 이모의 여유 넘치는 카리스마를 본받아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나는 그렇게 부를 테다.



연자 이모와 나의 짧은 인연은 나의 모교 축제에 와서 망토로 학생들을 뒤집어놓고 가셨을 때부터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연자 누님의 망토 돌리기에 시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우들이 열광했고 SNS 상에 잠시나마 그 영상이 유명해지면서, 세상 노잼이라고 소문났던 모교의 축제가 한순간 핫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인턴 생활과 취업 준비를 동시에 시작하면서 정신없이 살다보니 트로트 감상을 잠시동안 멀리하게 되었다.


이후 계약직을 전전하며 계속 취업 준비를 하다가 COVID-19와 맞물려 퇴사를 하게 되고 꼼짝없이 코로나 백수가 된 나는 2년 간 600개가 넘는 입사지원서를 난사했다. 거의 500개 정도의 서류가 탈락하고 어렵사리 붙은 채용연계형 인턴을 하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쌔빠지게 일하면서 1차 PT를 거쳤고, 최종 PT면접과 임원면접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는 최종 면접에서 너무 떤 나머지 염소 목소리를 내며 헛소리를 했고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퇴직을 며칠 앞둔 아빠의 생신날, 나는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고는 방문을 닫고 며칠을 펑펑 울었다. 그 이후로도 귀하의 출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채용 인원으로 인해 최종 합격의 소식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문자와 메일이 하나둘 쌓여갈수록 내가 세상 어딘가에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뭐라도 해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늘어갔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어떤 날은 씻지도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롱패딩으로 무장한 채 밖에 나가서 무작정 달리기도 했고, 밤에는 정신을 개조시켜 준다는 마인드셋 영상을 유튜브로 보며, 매일 하루만 더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최후의 보루로 나에게 밥과 술을 사줄 능력이 있는 귀인 같은 직장인 친구에게 빌붙어서 상담도 해봤다. 술에 쩔은 채 질질 짜는 나를 두고, 친구는 내 정수리를 토닥이며 하나의 조언을 건넸다.

”살기 싫을 땐 집에서 신나는 음악 틀고 아무 춤이라도 춰봐“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고 싶지도 않았던 날이 이어졌던 날, 나는 친구를 만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뽕짝을 틀었다. 자고 있을 가족들을 배려해서 무선 이어폰을 살포시 귀에 꽂고 나의 구세주 트로트 메들리를 찾았다. 그날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기특하게도 맨 처음 영상으로 내가 가장 애정하는 노래 ‘블링블링’을 선곡해줬다. 역시나 도입부에서 연자 이모의 여유 넘치는 모습이 좋았고, 절정에 치닫는 노래 가사는 그날 유난히 나에게 와닿았다.


“이 세상사가 다 그래 간절히 원할 때는 더디고

마음을 비우니까 어느새 눈처럼 녹아들잖아

오늘은 Party Party 한번 뿐인 인생 나를 더 사랑하며 살거야

더 많이많이 행복하고 싶어 이렇게 하루하루 블링블링 Oh Yeah“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몸부림 비슷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다 듣고, 위의 가사가 나오는 부분을 다시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간절히 원할 때는 더디고 마음을 비우니까 어느새 눈처럼 녹아들잖아. 세상사가 진짜 다 그런 건가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번 뿐인 인생 오늘 나를 더 사랑하고 아끼고 응원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매일이 나를 위한 축제라고 생각하며 오늘 하루 버티면 쬐끔 더 나은 내일이 올 수도 있고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블링블링한 나날들을 만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나는 친구의 조언을 따라 맨정신인 밤에도 몇 번 더 춤을 췄고 몇 개의 면접을 더 본 다음에 작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물론 또 인원 감축이 있을 예정이어서 불안불안하긴 하지만 어찌 됐든, 위기는 기회고 기회는 곧 다른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또한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오늘도 Party Party 청춘은 다시다시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지

행복은 많이많이 사랑도 많이많이 이렇게 오늘도 블링블링“


Oh Yeah!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