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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Mar 03. 2023

섭산적의 꼬소함

친가 쪽은 아직 제사를 지내는 집이다. 예전에 할머니가 집안의 최고 어른이었던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할머니댁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했다. 제사를 왜 지내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게 너무 당연했고 앞니가 빠지기 시작할 때부턴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 앉아 계란 한 판으로 계란물을 만들거나 산적꼬지를 재료를 썰어서 끼우는 것들을 하며 부엌을 알짱거렸다.

내가 몇 십분을 앉아서 꼬물거리는 걸 보면 할머니는 우리 막내아들이 낳은 딸내미가 다 컸다며 엉덩이를 톡톡 두들기곤 하셨다. 할머니를 닮아 작고 주름이 많은 내 손을 보며 항상 좀 아쉬워하셨지만 이것저것 음식 재료에 손을 대는 나를 말리지는 않으셨다. 다만, 소고기 산적만은 항상 할머니께서 해야 한다며 보일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차가운 부엌 구석에 앉아 불편한 한쪽 다리를 펴고 냉장고에 반쯤 몸을 기대어 섭산적을 만들곤 하셨다.

선홍빛 소고기에 간장, 설탕, 참기름, 후추 등등의 재료를 넣고 할머니의 오른손으로 재료를 조물조물 섞어 고기를 한참 치댄다. 그 다음 두꺼운 나무 도마 위에서 정사각형 모양으로 고기를 평평하게 놓은 다음 수십 번을 칼로 다지고 또 다진다. 다지는 와중에도 모양이 흐트러질새라 할머니는 엄지손가락이 살짝 뒤집어질 정도로 손끝에 힘을 주고 끝부분을 다듬고 또 매만졌다. 한참을 그렇게 다듬어진 고기는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중불에서 구워져 제삿상 한쪽을 차지하곤 했다. 그렇게 구워낸 섭산적은 따끈할 때 한쪽 귀퉁이를 몰래 떼어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는 짭조름한 고기 향이 좋았고 식었을 때 먹어도 파삭하게 입안에서 퍼지는 식감과 꼬수운 맛이 좋았다.

제사가 끝나고 제삿밥을 먹을 때, 먼저 상을 받는 남자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과 탕국, 여러가지 전, 산적, 튀김을 한입 가득 먹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는 흐뭇해했다. 나는 내가 만든 음식들엔 잘 손이 가지 않았다. 음식을 하다가 질려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 여튼 나는 다른 제사음식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항상 나물과 섭산적만 조금 먹다가 상에서 물러났다.

제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는 우리를 붙잡고 할머니는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주셨지만 섭산적을 다른 것만큼 많이 챙겨주시지는 않는 게 조금 아쉬웠다. 소고기로 만드는 산적인 만큼 넉넉하게 하지도 못했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냉큼 많이 집어 오기도 조금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가 해주는 고기반찬이며 삼겹살, 목살에 밀려 섭산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은 제사음식은 항상 엄마 아빠의 몫이었다.

항상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섭산적은 10여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정정했던 할머니가 몸이 불편해지셔서 요양병원에 가게 되셨고,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제 할머니표 섭산적은 정확한 요리법도 모르고 그래서 구경도 할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 놀러 가서 헛제삿밥을 파는 식당에 가거나 그 어느 떡갈비 맛집을 가도 섭산적 비슷한 맛을 내는 것을 찾기도 힘들었다.

며칠 전엔 옛날 할머니 집 부엌에 앉아 섭산적을 함께 다지는 꿈을 꿨다. 나는 다 큰 어른이었고 할머니는 내가 예닐곱 살 때쯤 보던 모습이었다. 우리는 같은 자세로 한쪽 다리는 펴고 한쪽 다리를 몸에 붙이고 비스듬히 앉아 도마를 앞에 두고 선홍빛 고기를 다졌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두껍고 오래된 칼로 한참 고기를 다지며 모서리 부분을 매만질 때 서로의 엄지손가락 끝이 뒤집어지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웃었다. 내 누구 닮아 손이 이래 못난가 했드만 할매를 닮아 그렇네, 하며 나도 웃었다.

한참을 할머니와 같이 있다가 꿈을 깼다. 지금 내가 일어난 침대 위가 꿈인지 섭산적을 만들었던게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한 꿈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꾸는 할머니 꿈에 설레었고 애틋했고 그만큼 반가웠다. 비록 꿈에서 고기를 열심히 다지기만 하고 구워내기까지는 못했지만 섭산적의 꼬소함이 간만에 생각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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