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1인칭단수>가 출판되자 마자 베스트 셀러가 됐다. 나는 2020년 2학기에 일본어 공부를 해볼 요량으로 번역본이 출판되기 전에 원서를 사서 웬만한 사람보다 일찍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2학기가 끝나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자고 목표를 세웠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결국 2020년이 끝날 때 책의 절반 정도를 겨우 읽었다. 한학기 동안 이 책을 읽느라 끙끙대는 동안 번역서가 나왔고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의 독자도 하루키의 최신 단편집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많은 사람이 나보다 늦게 <1인칭단수>를 읽기 시작해서 일찍 다 읽었다.
2020년 마지막 밤에 다른 사람들처럼 시상식이나 음악 방송을 보며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2020년이 3분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오 뭐야. 진짜 끝나는 거야? 그렇게 2020년이 끝났다.
2020년에는 예정되어 있었던 교환학생을 못 갔고 다급하게 수강신청한 1학기 성적은 어정쩡했다. 온라인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재미도 없었다. 기숙사 방 의자는 딱딱해서 오래 앉아있기 불편했다. 엉덩이를 의자 끝으로 밀었다가 가장 안쪽에 붙였다가를 반복하다 결국 30분 만에 일어나고 말았다. 의자에서 일어나면 닫힌 카페 문이 생각났다. 결국 침대에 엎드려서 수업을 듣다 자는 날이 이어졌다.
어정쩡하고 애매하고 답답한 날들이 이어졌다. 기억의 기둥이 될만한 이벤트가 없으니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는 듯했다.
백야를 걷는 기분이 이럴까. 낮 속에서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었다. 한 것도 없는데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긴 낮들. 하루는 오후 10시가 넘은지도 모르고 걸었다. 하루는 이제 지쳤으니 그만 걸을까 하고 시계를 봤더니 겨우 정오였다. 언제 멈춰야할지, 이제는 멈춰도 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 <설국>에서 도회지와 떨어진 환상의 공간 설국에 들어선 순간을 알리는 유명한 문장이 오늘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2021년이 시작하는 지금 본 이 문장은 허무의 시간으로 들어선 2020년 나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 같다.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한 빚을 독촉하는 독촉장이 2020년이 마무리되며 날아왔다. 나는 남들처럼 에이플러스로 도배된 성적표를 게시하지 못했다. 남들처럼 인턴을 하지도 못했다. 남들처럼 유튜브로 성공하지도 못했다. 남들처럼 취업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남들처럼 창업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독촉장답게 왜 너는 남들처럼 되지 못했냐고 나를 추궁했다.
남들은 내 주변에는 없었다. 미디어에 비친 남들은 내 지인 중 10분의 1도 안된다. 알면서도 남들과 나를 비교하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이 글은 절규다. 새까만 어둠마저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허무를 향해서, 백야를 향해서 지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남들은 없다는 절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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