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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May 05. 2017

어느 화가에 대하여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유달리 커다란 눈동자 때문인지, 혹은 그녀만의 분위기 때문인지 내게는 제법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부리부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커다란 눈. 뿐만 아니라 이목구비 모두 크고 뚜렷했던 그녀. 목소리는 조금 낮지만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잘 전하는 특유의 에너지가 있어, 그녀가 하는 말도, 그녀의 성격도 모두 듣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게 느껴지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주로 하는 그림 작업들이 대부분 대형 캔버스라는 것도 왠지 그럴 법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집은 아주 오래 된 아파트였다.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면 바로 길다란 회랑처럼 복도가 나있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집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준 것은, 그 공간을 가득 메운 대형 캔버스였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캔버스에는 온통 유화물감으로 붉고 노란 색깔들이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좁은 복도를 따라 걸으며, 벽면을 가득 채운, 거칠게 덧칠되어 있던 유화의 질감과 고흐를 연상케 하던 색감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캔버스 가득 꽃잎과, 첼로와 붉은 빛으로 분할된 그림이 있었고, 나는 첼로 뒤에 붉게 칠해진 꽃잎 하나하나가 마치 선혈처럼 느껴져,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리는 듯한 선명한 붉음에, 떨림을 느꼈다.

짧은 복도를 지나 곧 마주한 거실이며 부엌, 그리고 방방마다 그림들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집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내게 남겼다. 새롭게 시도해보는 연작이라며, 그녀의 집 곳곳에는 아직 표구조차 못한, 첼로와 다양한 꽃잎과 가지로 가득한 작품들로 넘쳐 있었다.

의외였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린 인물화에는 연필로 그린 엷은 데생의 흔적이 남아져 있었고, 평상시 그녀의 화풍과는 다른 맑은 수채화 물감으로 연하고 부드럽게 그려져 있었다. 보통은 두꺼운 유화물감으로 덧붙여지고 덧그려져 때때로 이미지가 뭉개져버린 채 몇몇의 간소화된 선만 남기던 그녀의 강렬한 화풍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직접 부딪히는 그녀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어린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부드럽고 맑아지는구나 라던 짧은 감탄이 나왔다. 마치 두꺼운 유화물감 속에 감춰진 그녀의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을 몰래 마주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차 한 잔과 마주하며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집 어디든 스며들어 있던 유화 냄새와 테레빈유, 팔레트며 붓, 그리고 캔버스마다 뭉개어져 발라져 있던 물감들의 어두운 질감이 한동안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후로 오랜 뒤에 나는 그녀에게서 판화 세 점을 연이어 선물로 받았다. 그림을 담는 액자마저도 그녀만의 특유의 감성으로 은은하고 고운 색감으로 골라져있는 정성 어린 선물이었다. 늘 유화 작업만 하던 그녀가 판화를 한다니, 그것도 목판화라, 몇날며칠을 직접 나무판을 조각칼과 끌로 깎아 내고, 다시 잉크를 통해 여러 번 작품을 찍어내는 과정을 겪었을 그녀의 동선을 그려보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 숨어있을 그녀의 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특히 맨 처음 그녀에게서 받은 판화 한 점은 내게 두고두고 오랜 기간 위안이 되었다. 연못의 낮은 물결과 그 위로 돋아난 수풀과 이름 모를 들꽃, 길게 내려온 담쟁이 넝쿨들과 수면 위의 그림자가 짙은 회색에 가까운 무채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판화였다. 간간이 채도가 낮은 청록빛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무채색에 가깝게 느껴지는, 얼핏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어둡게 느껴지기도 하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판화는 아름다웠다. 판화 위로 햇살이 비치면, 그녀의 판화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정말 깊고 부드러워져, 나는 해가 질 무렵의 짙고 조금씩 붉어지는 다정한 오후가 되면 종종 햇살이 스며든 판화를 바라보곤 했다. 짙은 청록색이 햇살을 받아 밝고 부드럽게 빛나면, 인위적인 조명 아래서나 어두운 그늘 속에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깊은 색감들이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은, 수심이 낮은 물살을, 수면 위로 다가오는 바람과, 천천히 흔들리며 일렁이는 물살들과, 수풀과 들꽃들 사이로 가만히 둥글게 몸을 마는 바람들을, 그 동굴 같은 깊은 고요함을 내 안에, 내 인생 안에 들여놓는 일과도 같았다. 그러니, 어찌, 그녀의 그림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녀의 판화에서, 고요한 쉼과 같은 삶의 풍경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뒤이어 받은 판화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는 매우 작은 소품으로, 인근 고등학교 공사장에서 가져온 나무판자 한 조각에 새겨 만든 작품이었다. 교실 혹은 복도, 어디든 걸으면 곧잘 삐거덕- 길게 소리를 내던 나무 바닥을 기억하는가. 그녀는 그 나무 바닥의 한 조각을 떼어내어 곱게 마른 꽃봉오리들과 작은 화병을 새겼다. 이후 고운 감빛과 풀빛으로 직접 손으로 꾹꾹 눌러 찍어내었다. 일반 목판용 목재와는 달리 두껍고 거친 마루바닥이라 조각칼로 무언가를 표현해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이나. 그녀는 이렇듯 일상 속에서 직접 부딪히며 무언가를 새기고 그리고 만들곤 했다. 그녀가 내게 건넨, 나무 조각 위에 새겨진 판화들은, 누군가의 숨 가쁘고 기쁘고 슬프고 혹은 무심한 발걸음 밑에서 오랫동안 삐걱거렸을 나무 바닥의 길고 긴 이야기들을 무언의 목소리로 들려주곤 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꽤나 다양하고 깊은 삶의 부침을 겪어야 했는데, 제법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그녀의 판화들은 늘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아버지가 또 다른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얼핏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그녀가 암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다른 가족력으로 아마도 그녀는 순간순간 많이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녀마저도 유방암으로 판정 났을 때, 그녀는 좌절했으나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완전 초기는 아니었으나 다행히 말기까지 아니어서 수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로도 그녀는 끊임없이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오랜 항암치료는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워낙 개성적인 그녀가 보다 예민하고, 더 날카롭게 변해버렸던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료들과도 그리 원만하지 않았고, 이따금 큰 목소리로 다툼을 해서 미운털이 박히기도 했다는 것도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의 인정스러웠던 성품은 그대로였다. 유산기가 있었던 동료를 위해 그녀는 화실에 길고 큰 의자를 놓아두고 자주 그녀의 화실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서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졌던 동료는 곧잘 퉁퉁 부은 다리로 그녀의 화실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곤 했었다. 날카롭지만, 동시에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였던 그녀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세상을 향한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늦은 나이였지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콜라주 외에도 수많은 연작과 유화와 판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래서 더더욱 뜻밖이었다, 4월, 늦은 봄, 그녀의 죽음은.



그녀는 언제나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속을 파고들던 암은, 점차 힘을 잃어가는 그녀에게, 폐암으로 전이되었다. 주변인들에게 밝히지 않았으나, 폐암으로 전이된 것은 벌써 3년 전부터였다고 했다. 그녀는 남은 시간을 병마와 싸우는 데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폐암으로 전이되어 더는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듣고는, 그녀의 딸에게 해외여행을 제안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녀의 딸은 그녀의 상태가 호전된 줄로만 알았고,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두 모녀는 유럽으로 떠났다. 

보름이 넘는 제법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마음으로만 상상했던 지중해를 눈에 담았고,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떠났고, 시간을 건너뛰어 여전히 빛나는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들을 멀어져 가는 눈과 그럴수록 더욱 빛났던 그녀의 마음과 영혼 속에 생생히 담았다. 그녀를 닮아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던 딸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녀를 담았다. 유럽의 골목과 광장과 노천카페에서 환히 웃던 그녀를. 그녀의 딸은 미처 몰랐고,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들을…….


떨리는 두 손으로 작게 스케치를 하며, 그곳에서 그녀는 자유롭게 웃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딸과, 다시 오지 못할 마지막 여행을 하는 동안, 그녀는 많은 진통제들을 삼켜야 했다. 딸에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더더욱 뒤돌아서서 새벽이면 더욱 심해지던 고통들을 참으며, 낯선 이국땅에서 자주 오르던 열과 기침들을 덩달아 삼켜야 했다. 그녀 몸 구석구석, 이미 가슴과 폐로 퍼져있었던 암세포들은 그녀를 꽤나 괴롭혔다. 그러나 그녀의 숭고한 삶의 의지- 자신의 마지막을 더욱 아름답고 멋지게 보내고자 했던, 그녀의 생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녀는 그림들을 하나 둘 정리했고, 그녀의 소원이던 전시회를 서울의 자그마한 화랑에서 열었다. 일에 치여 살던 나는 미처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열정어린 작품들을 오롯이 모아놓은 전시회를 마주하지 못함이 아쉬웠고,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독 전시회를 직접 열었던 그녀의 담대한 열정에 놀라웠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가는 육신을 안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도 충실하게 마무리를 지어갈 수 있는 있는 담대한 열정. 마지막에 그녀는 몰핀으로, 진통제를 맞으며 의식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고 했다. 온몸이 떨리던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의지대로 사랑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생을 마감했다.


지금, 그녀를 떠나보내고서야, 안다, 그녀는 후회 없이 자신의 생을 꽃처럼 피워낸 사람이었음을. 이제는 떠나가 버렸으나, 그녀는 언제나 ‘생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으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언제나 붉은 빛으로 타오르던, 마지막 삶의 조각들까지 오롯이 그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열정어린 삶을. 그녀의 생이 가진 의미는, 이제, 또다시, 남아있는 자들에게로 온다.


유난히도 아픈 4월이었다. 이제는 4월을 떠나보낸다. 봄을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누군가는 미처 꽃피우지 못하고 저버렸고, 또 누군가는 담대했던, 날들이, 간다. 그녀의 치열했던 삶에 기대여, 나는, 더는 애닯아 하지 않겠다. 나는, 이제, 하루를 살아도 뜨겁고 충일한 삶이길 바라던 그녀의 소망대로, 푸른 선언처럼, 이 하루를 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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