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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푸른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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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Nov 02. 2018

다시 숲에서


산허리와 산허리가 겹쳐 더 깊고 그윽한 그늘을 만들어 내는 법인데, 나는 당신과 세상을 향해 종종 모난 바위덩이처럼 날카롭게 곤두서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찬 폭우가 쏟아질 때 산은 흙이 패이도록 매섭게 내려꽂는 빗줄기들을 자신의 몸 깊숙이 받아들였다가는 가물어가는 날에 조금씩 내어놓기 때문에 숲이 살아있는 녹색의 댐이라 불린다는 푯말을 읽어 내려가다가 몹시 부끄러워진다.


나는 당신을, 이 세상을 온전히 품어내지 못했구나. 숲이 깊어질 수 있는 이유 역시, 세상에서 버림받는 보잘 것 없는 흙덩이와 메마른 바위팍과 응달 속에서 서서히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숱한 낙엽들 때문이었을 거다. 그들을 품었기에, 숲은 세찬 물도 스스로 제 안으로 갈무리지었을 것이다. 그리곤 제 안에 출렁이는 푸른 물을, 가문 날에 목마른 자에게도 나눠주었으리라. 그리하여 양지바른 곳에서 이름 없는 들꽃도 숲에 의지하여 그 향기를 피워 올렸던 것이리라.   



돌아오는 길, 나는 당신에게로 손을 내민다. 당신의 깊은 눈매, 그 옆으로 어느 사이 깊어져 가는 선들이 새삼스럽다. 당신을 닮은 우리의 달 같은 아이들을 낳고, 달을 닮은 아이들은 곧 자라서 성큼성큼 우리 곁을 지나서 저만큼 앞서 걸어가 버리는 게 당연한 삶의 이치라면, 나도 이제쯤은 저 숲을 닮았으면 한다.


착하게 바람과 햇살과 나무와 풀잎과 부스러기와 흙과 돌이 아름다운 공존을 하는 곳. 도토리를 손에 올려놓자 잠시 머뭇거리던 청솔모가 다가와 내 손 위에서 자연이 준 양식을 소중히 갈무리하는 곳.

 


그랬다, 숲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어도 좋았다. 분주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길을 잠시 잊어도 좋았다. 상처입어 날카로웠던 기억도, 바쁘게 내몰려야 하는 경쟁어린 삶도, 현란하게 포장되어 있는 물욕(物慾)에의 욕구도, 이곳에서는 잊어도 좋았다. 시간이 본연의 얼굴을 내비치며 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에서는, 잠시 멈춰 있어도 좋았다.


돌아오는 길, 누구나 한 줌씩은 더 가벼워져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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