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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수 Aug 28. 2016

죠슈아 키미히: 올라오는 것

바이에른 뮌헨의 유망주, 키미히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유리 깨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우리는 죄책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또다시 창문을 깨트린 것이다.

집 안에 있는 엄마에게는 이 소리가 너무나 익숙했다. 이제는 무슨 일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밖으로 나와 우리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누구니?"

나는 Black Forest와 슈투트가르트 사이에 위치한 Bosing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마을이 작았다고 설명한 이유는 정말 작아서이다. 1,700명보다 더 적은 사람들이 마을에 살았으니까. 우리 모두 축구를 사랑했지만 나와 같은 아이들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적었다.

그래서 창문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여름에는 엄마의 꽃들을 밟으며 부모님의 정원에서 축구를 했다. 겨울에는 집 앞에 있는 거리에서 놀았다. 물론 창문은 어느 때도 안전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정원은 내가 축구를 배우고 사랑하기 시작한 곳이다. 아빠는 내가 네 다섯 살쯤이었을 때 왼발과 오른발로 패스와 슈팅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더 나이를 먹은 후에는 동네 형들과 정원에서 만나서 축구를 했다.

내가 7살이 됐을 때, 부모님은 내가 너무 많은 창문을 깼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 축구 골대 두 개가 있었다. 지역 축구 팀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던 골대였고, 부모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대를 집에 가져왔다. 아빠는 집 앞에 있는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들아, 저기 가서 놀아라."


사진: JOSHUA KIMMICH


우리는 필드 하나를 만들었다. 우리만의 필드. 학교가 끝난 후에도 주말에도 필드에 나가 축구를 했다. 우리만의 "스타디움"을 위해 스탠드도 만들었다. 집을 새로 지은 이웃에게 남은 나뭇조각들이 있었고, 우리는 당연히 모든 걸 가져왔다. 우리는 흙을 쌓아 올린 후 나뭇조각들을 이용해 스탠드와 작은 계단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경기를 볼 수 있게 임시 스탠드도 만들었다. 우리 모두 프로 선수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 모두의 꿈은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소유하는 유니폼 -- 지단, 슈바인슈타이거, 혹은 토마시 로시츠키 --  중 하나를 입고 진짜 스타디움에서 축구를 하는 꿈을 꿨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프로 축구 선수였고, 팬들은 나의 이름을 소리쳤으며, 모두 KIMMICH라고 써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환호들이 -- 상상 속의 환호들도 -- 멈췄다.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내 친구들 같지는 않았다. 이웃 한 명이 우리 필드가 위치한 땅을 사서 그 땅을 새롭게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너무 화가 나고 슬펐다. 그건 우리의 경기장이었다. 그건 우리의 스탠드였다. 나는 내 방에 있는 창문을 통해 공사 트럭들이 필드에 가는 걸 봤다. 스탠드를 내리고 필드의 땅을 파는 것도 봤다. 그 위에 인조 강과 정원이 만들어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을 옆 편에 살고 있는 내 할아버지가 구조에 나섰다. 할아버지 집 옆에는 쓰이지 않는 땅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에 다시 골대를 설치하고 스타디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작은 클럽 하우스도 만들어서 주말에 온종일 축구를 하고 밤에는 그곳에서 잘 수 있게 했다. 가끔씩은 밤에 바비큐 파티를 했고, 아침에 일어나 경기를 하기 전에 아침도 만들어 먹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축구 하나뿐이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지역 축구 클럽 유스 팀에서 훈련했을 정도였으니까.

하루는 내 팀이 슈투트가르트의 유스 팀과 경기를 했다. 슈투트가르트는 수많은 프로 선수들을 키워낸 지역 최고의 클럽이다. 나는 그들을 상대로 세 골을 넣으며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사진: HERBERT RUDEL


나를 알린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가 나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안된다고 말했다. 나는 오직 여덟 살이었고, 슈투트가르트에 가려면 매주 두 시간의 왕복을 해야 했다.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 나는 이미 훌륭한 팀에 있었고 아카데미에 너무 일찍 들어가는 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고 있었다. 우리 동내에는 여덟 살의 나이에 아카데미에 들어간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방출되고 말았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발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3년간 내가 지역 클럽들에서 활약을 펼치자 슈투트가르트가 부모님을 끊임없이 압박하기 시작했다. 경기장에 초대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끄떡하지 않았다.

"우리에게서 무언갈 얻고 싶으면 그들이 우리에게 와야 된다," 아빠는 말했다. 

아빠의 말을 들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슈투트가르트의 유스팀 코치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는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는데, 이미 부모님은 내가 슈투트가르트에 들어가는 게 최상의 선택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몇 주 전, 슈투트가르트는 자신들의 다섯 번째 리그 우승을 자축한 상태였다. 

한 주에 몇 번 씩 아빠가 나를 슈투트가르트에 데려다주셨다. 하지만 2년이 지나자 너무 힘들어졌다.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0시 이후에 집에 도착했다. 숙제는 차에서 하거나 밤늦게 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정식 제의가 들어왔다. 매년 슈투트가르트는 오직 18명에게 정식 제의를 한다 -- 그리고 나는 그 18명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풀 타임으로 뛰는 것은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을 뜻했다. 나와 부모님을 대화를 했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최상의 선택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짐을 싸고 차에 실어 아카데미로 향했다. 엄마는 나를 껴안을 때 눈물을 참았다 -- 우는 걸 보여주시기 싫어하신 모양이다. 

아카데미에 선택된 아이들 중 내가 아는 선수가 한 명 있었다.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어렸다 -- 오직 14살이었다. 우리는 건물을 돌아다니며 아카데미 선수들에게 인사를 하기로 했다.

"안녕! 나는 죠슈아야!" 나는 친근하게 보이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곧 가장 어린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식사 후 주방과 테이블을 청소하는 것. 하지만 모든 게 괜찮았다. 매일 축구를 할 수 있었으니까. 

4년이 지나고 시즌 몇 개를 치르자 더 많은 걸 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직 18살이었지만 독일 3부 리그에 있는 슈투트가르트의 2군 팀에서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팀은 나와 생각이 같지 않았다.

"너는 아직이야. 너의 몸은 아직 완벽하지 않아," 코치들이 내가 유스 팀에서 1년을 더 보내야 한다면서 말했다. 그들은 내 포지션에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이 있다고 했다.

"너는 그들을 이길 수 없어."



하지만 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을 보여주길 원했다. 그리고 만약 이 팀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를 믿을 수 있는 팀을 찾고 싶었다.

내가 배운 가장 큰 레슨은 이거다: 나를 신뢰하고 믿는 감독과 코치들이 있어야 하는 것. 얼마 후 내 집을 찾아 슈투트가르트에 들어오라고 설득했던 유스 디렉터가 RB 라이프치히라는 클럽에 새로 정착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감독이자 유럽 축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인 랄프 랑닉을 찾아갔다. 나는 그가 젊은 선수들과 많이 일해본 것을 알았다. 라이프치히에서 뛰는 건 집에서 더 멀리 떨어지는 걸 뜻했지만 프로 레벨에서 뛰기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랬듯이 부모님과 대화했다.

랄프와 클럽이 나에게 주는 신뢰를 느끼며 생각했다,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된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 중 하나가 시작됐다.

나는 라이프치히에 입단했을 때 이미 부상을 입고 있었고, 재활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나는 재활을 4개월 동안 했는데, 그동안 팀과 함께 훈련을 할 수 없었다. 팀이 훈련을 할 때 코치와 함께 일 대 일 훈련을 할 뿐이었다. 나는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동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 했다. 나는 집과 550km 떨어져 있는 호텔에서 혼자 지내면서 TV, 노트북, 핸드폰과 함께 생활했다. 매일 집에 전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가 원하면 내가 갈게," 엄마는 말했다. "몇 주 동안 네 옆에 있을 수 있어."

나는 정말 외로웠지만 혼자 극복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나의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기에 뛰기 시작했고, 동료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나는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뛰고 있었다.


사진: ANGELIKA WARMUTH/PICTURE-ALLIANCE/DPA/AP IMAGES


우리는 경기에서 승리했고, 필드를 내려올 때 정말 좋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내가 충분히 능력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나는 3부 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나는 프로 선수였다. 더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월에 내 에이전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이에른 뮌헨이 너를 원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겠니?"

잠깐만, 뭐라고?

"뭐? 불가능해."

"죠슈아, 그들이 너를 원해."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감독에게서 듣고 싶어," 나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클럽 중 하나가 나를 원한다고? 몇 주 후, 나는 펩 과르디올라와 만나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펩은 TV에서 본 인물이었다. 나는 정말 긴장했지만 그를 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 믿음. 그리고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바이에른에서 뛰고 싶다. 펩은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른 스타일의 플레이가 나를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는지 설명했다.

"나는 너를 원해," 그가 말했다.


사진: ALEXANDER HASSENSTEIN/BONGARTS/GETTY IMAGES


그 순간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다.


펩과 바이에른 뮌헨이 나의 무언가를 봤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투적인 문구지만, 지난 1년은 나에게 꿈만 같았다. 나는 오직 21살이고, 매일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해본 선수들이 나의 동료다.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첫 번째 경기를 치르는 건 매우 긴장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마뉴엘 노이어, 토마스 뮐러, 필립 람, 제롬 보아텡과 같은 선수들과 같이 뛰는 건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내 옆에 있고 정말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바이에른 팬들이 있다.

매주 75,000명의 팬들이 알리안츠 아레나를 찾는다. 내가 어렸을 때, 나와 아빠는 바이에른의 경기를 보러 경기장을 찾곤 했다. 모든 게 크고 시끄러웠다. 내가 본 가장 큰 스타디움이었고, 그 스타디움은 나를 압도했다. 10년 후, 아빠는 다시 경기장에 있었고, 내가 바이에른 뮌헨 데뷔전을 치르는 걸 지켜봤다. 나는 챔피언스리그 경기들을 치렀고, 분데스리가를 우승했으며, 정말 환상적인 경험을 얻었다.


사진: MATTHIAS HANGST/BONGARTS/GETTY IMAGES


나는 가끔 Bosingen에 있는 작은 스타디움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팬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상상을 했던 경험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게 커졌다 -- 그리고 모든 게 내가 상상했던 것에 비해 매우 다르다.


이번 여름휴가 때 고향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후반기 활약과 유로에서의 활약을 칭찬하고 축하해줬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유로 2016 팀 오브 더 토너먼트에 이름을 올렸다. 동료인 제롬 보아텡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앙투안 그리즈만과 같은 스타들과 함께.

그 작은 마을에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게 몇 개 있다 -- 모든 사람들이 축구에 미친 것, 아이들이 유니폼을 입고 뛰어노는 것. 다른 것들은 달라졌다. 우리의 필드와 클럽 하우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골대 하나가 할아버지 집에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축구 선수를 꿈꾸는 나의 사촌을 위해 그 골대를 집 앞에 놔뒀다.

내 사촌은 왼발과 오른발로 패스와 슈팅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바이에른 뮌헨 유니폼을 입는다. KIMMICH라고 써진 유니폼을 말이다.

원본: 
http://www.theplayerstribune.com/joshua-kimmich-bayern-mun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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