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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Dec 28. 2021

사실 아깝긴 하다

그래도 사랑해

 어제는 나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그동안 엄마에게 보냈던 용돈을 마지막으로 드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달이 드렸던 목돈을 용돈으로 줄이는 날이었다. 누구나 무슨 말인지 갸우뚱 할테지? 나는 취업함과 동시에 부모님께서 갖고 있는 빚을 함께 갚고자 돈을 보내드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반은 협의적이었고, 반은 강제적이었다. 엄마가 당연하게 ‘얼마 보내라’라고 말씀하셨고, 나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기에. 도대체 얼마길래 목돈이라 할까? 타지 생활을 하면서 월급쟁이인 내가 약 5년 간 매월 보내드린 돈은 170만 원이었다. 한 달에 170을 4년 6개월, 그리고 반 년 정도를 130만 원 보내드렸다. 25살에 처음 취업을 했을 땐 비교적 연봉이 높은 편이었고, 돈 쓰는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욕심도 없고 그 돈이 아쉬울 정신 없이 회사일 배우기 바빴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는 주식을 하고, 누구는 적금 얼마를 들고, 누구는 1년에 여행을 얼마나 가고, 누구는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보러 다니는 등. 삶은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에 나는 없었다. 심지어 아껴 써야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회사일도 상당히 바빴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했다. 해외는 커녕 가까운 국내 여행도 못갔고, 재테크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관리할 돈도 없으니.


 빠듯한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부모님께 보내드리는 돈이 아까워지곤 했다. 누군가는 왜 그걸 바보같이 말도 못하고 다 드렸대? 라고 하겠지. 나도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땐 안 그럼 부모님이 너무 힘들 것 같았고, 나야 언제든 돈은 벌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빚이 마무리되면 그때부터 여행도 가고 돈도 모으고 집도 마련해야지 했던 듯. 세상 물정 모를 땐 그게 다 쉬울 줄 알았다. 2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이에 맞게 결혼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돈에서 막혔다. 여행이고 뭐고 난 언제 돈벌어서 결혼하지? 남들이 몇 년동안 차근차근 모아둔 그 돈을 어떻게 따라잡지? 서른이 된 올해는 엄마와 상의를 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나 고민만 많아지던 중 어쩌다가 부모님과 돈얘기가 나왔다. 부모님의 연금 이야기로 시작했던 것 같다. 별다른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하신 분들이여서 노후 자금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예민해진다. 하지만 자식들이라고 어찌 전부를 책임져줄 수 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식들도 본인 가정이 생기면 부모님을 책임질 수는 없다. 이것이 현실이란 걸 점점 깨닫고 나 조차도 지금 결혼 준비를 시작도 못한 상태에서 부모님의 노후 준비에 대한 얘길 들으니 듣기만 해도 부담이었다. ‘지금부터 재산 늘릴 생각 하지말고 현금을 쟁여놔. 우리가 지금처럼 돈을 줄 수 있는게 아니잖아.’ 이 말이 화가 되어 엄마와 다툼이 되었다. 솔직히 그때는 이렇게 돈때문에 다툴 줄 알았다면 돈을 애당초 주지도 않았을텐데. 후회가 막심했다. 그동안 보내면서 고생했던 나의 나날들이 모두 헛됨이 되는 것 같고,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올해까지만 보내고 내년부턴 보내지 마.’


 빚 해결이 끝나서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약간 서운함이 섞인 듯한 엄마의 말. 그래도 더이상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알겠다고 했다. 서로 금이 가듯이 그런 건 아니고 용돈은 주겠다면서 풀어주듯이 얘기했다. 기분 좋게 마무리가 돼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서로 금방 풀려서 돈을 얼마까지 보내줄 수 있는지 타협을 하고 이번 달 월급 받은 후 마지막 용돈인듯 목돈인듯한 정체모를 돈을 보내드렸다. 솔직한 마음으론 너무 행복했다. 물론 앞으로는 50만 원씩 보내드리기로 했고, 남들은 그것도 많다며 어찌 그걸 용돈이라 하냐 하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스트레스 없이 이젠 나의 삶을 살고 싶다. 전보다 확실히 줄기도 했고, 나도 많은건 알지만 그 정도는 부모님께 용돈이라고 드리고 싶다. 누가 뭐라든 난 후련했다.


 마지막으로 보내드리고 어젯 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어이고 우리 큰딸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니야~말이라도 고마워유~”

말만이 아니라 진짜 고마워~ 우리딸 타지에서 고생 많이 하는데 엄마한테 돈 보내느냐고 에효..”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급하게 흐느껴졌다. 분명히 행복하기만 했는데 울먹거리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엄마 원망도 솔직히 꽤 했는데. 엄마도 나한테 받으면서 편하지만은 않았나보다. 당연히 그러겠지 싶긴 했지만 엄마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 다 끝나고 나니까 엄마가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그대로 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1도 없지만. 마음이 조금 이상해졌달까.


 다음 달부터 확 늘어난 나의 월급으로 하고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재테크도 공부하고 못 다녔던 여행도 자주 다닐꺼다. 가끔 외식도 하고 적금도 들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사고 싶은 것도 사고, 배우고 싶은 것들도 배우고. 염색도 미용실 가서 제대로 하고 운전 면허도 따고. 아무리 생각해도 끝이 나지 않는 하고 싶은 일들.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만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아까울 때가 있는데 이젠 앞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삶이 더욱 열심히 다채로워지길.


 


수고했어. 사랑해, 좀 더 자유로워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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