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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12. 2018

출국 전

한국이 싫어서

그러니까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 것은 순전히 주변 환경 탓이었다. 미국에서 법정 통역사로 승승장구하고 계신 이모를 보며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사는 것이 신분상승의 길이라 굳게 믿었던 나는 한국이 싫어질 때마다 외국에 대한 환상을 키워 나갔다. 당시 절친한 친구 두 명이나 유럽에서 생활중이었고, 배낭여행에서 만난 친구마저 일본 유학생이었으니. 외국 생활에 대한 환상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어렸을 적부터 잘하는 것만 파고드는 성격인지라 한 평생을 수학 포기자로 살았고 그 덕에 좋은 성적을 거둘 리 만무했던 나는 일찌감치 주제를 파악하는 법을 깨달았다. 진작에 공부로 성공하기에 이번 생은 글러 먹은 데다 작가로는 벌어먹고살기 힘들다는 판단하에 급히 사서로 진로를 틀었고, 바늘구멍만큼 들어가기 힘든 취업문과 벗어날 없는 최저임금의 벽. 입으로 당당하게 '저 퇴사하겠습니다'를 말하기도 힘든 계약직이라는 신분 속에서 불만은 커져만 갔다.


지금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인데다가 워라밸이 보장되어 있으며 보람까지 가질 수 있는 준공무원이라는 매리트에 자부심을 갖고 임하고 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왜 굳이 이 직종을 택하여 사서 고생 중인지 스스로 한탄하는 날이 잦았다. 이러한 나의 개인적인 불만과 당시 불안정한 시국이 맞물려 이민을 꿈꾸었고 나에게 주어진 신분상승의 길은 이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처음부터 워킹홀리데이가 아닌 이민이 목적이었던 나는 당시 유학원을 상담하며 이민에 유리한 직종과 내가 현재 진학할 수 있는 대학교를 알아보았고, 서른은 되어서야 모을 수 있을 것 같은 학비에 좌절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아무리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것일지라도 살아보지도 않은 나라에 덜컥 전재산을 투자하여 학비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휴일은커녕 파견직과 다름없는 신분에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았던, 심지어 외근직이라는 이유로 내 자리조차 없었던 직장에서 군말 없이 일을 하며 (어차피 나는 퇴사할 거니까) 속으로는 이를 아득바득 갈고는 퇴근 후 자투리 시간과 주말을 모두 영어공부에 쏟으며 시드니행을 준비했다.


당시 나에게 있어 영어는 하나의 현실도피이자 만악의 근원과도 같았던지라 살며 처음으로 울면서 공부하였고, 악이란 악은 다 쏟아부은 덕에 문장 하나 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던 실력에서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10여 년의 세월을 학습지 영어에 할애한 것이 이제야 빛을 본 것이니라) 그렇게 영어가 무서워 울고 불던 기간이 지나고 출국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이렇게 한국을 떠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던 20대 중반의 직장인 4년 차가 대학시절에도 해보지 않았던 아르바이트를 해보며 인생이 리셋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호주에서 살며 단시간 내에 의지하고 속 터놓고 이야기하던 도연이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이 가볍게 와야 버틸 수 있는 거라고. 영주권과 이민까지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이 현실을 더욱 재빨리 깨닫고 결국엔 돌아가고야 만다고. 아쉽게도 나의 워킹홀리데이는 후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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