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을 보고서
한때 유행했던 김은숙 작가 드라마에선 이런 대사가 있다. ‘정말 어른은 자신이 어른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기가 어리다고 이야기하죠.’ 어린아이일수록 자신이 어른이라 말하고 어른일수록 자신이 아이라고 말한다는 그 대사를, 나는 나이를 먹고도 좀처럼 잊을 수 없었다. 아직은 내가 어리길 바라고 좀처럼 ‘이제 내 나이가 벌써’라는 말 따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 나는 때때로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일지 몰라도 영화 <레옹>은 나이만 먹으면 되는 소녀와 나이만 먹은 남자가 만나 서로의 고장 난 시곗바늘을 제대로 짚어주는 영화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아이로 어른은 이윽고 어른이 되는 이야기이다. 숱한 스테디셀러 영화들이 그러하듯 대개 사람들은 이야기를 대강 아는 것만으로도 그 영화를 보았다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마치 내가 영화 <레옹>을 보기 전에 그 유명한 러시안룰렛 장면과, 화분과, 두 사람의 패션만으로 그 영화를 모두 보았다 착각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소녀와 킬러가 만나 한 팔에 화분을 끼고 검정 코트에 선글라스를 낀 것이 아닌, 그 들이 이윽고 어떻게 헤어졌냐는 것이다.
극 중 레옹은 다소 무지막지한 직업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철칙과 순정을 지키며 아이 같은 순수성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리고 막상 아이 같아야 할 마틸다는 그녀 스스로가 자신이 아이임을 거부하고 순수성을 과감히 포기한 채, 어른이 되고자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레옹에게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여자로,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자에겐 복수로. 보통의 유년시절 가족의 몰살을 경험한 주인공들이라면, 그 들은 복수 이전에 성인이 되는 것을 원할 테지만 마틸다에게 자신이 12살인 것은 크게 개의치 않다. 이미 그녀에게 있어서 유년시절이란 재빠르게 지나가버린 찰나의 순간인 것이다.
반면 레옹의 시간은 18살 이후로 멈춰버린다. 사랑하는 여자와 평범한 인생을 동시에 잃어버린 그에겐 시간이란 그저 흘러가는 것이며, 나이를 먹는 것 역시 중요치 않다. 마틸다가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제 나이를 잃어버린 것과 반대로, 레옹은 그 18살 이후로 그 어떤 일도 겪지 못한 채 시간이 멈춰버렸다. 마치 시간이 고여있는 사람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버린 사람처럼. 그런 레옹이 스스로 어른임을 자각한 순간은 마틸다에게 알 수 없는 감정(연민 내지 혹은 사랑 또는 가족애 등)을 느끼며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순간일 것이다. 반면 마틸다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레옹으로 인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가 이실직고 자신의 상황을 말한 후 도움을 요청한다. 이윽고 어른은 어른으로, 아이는 아이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마틸다는 레옹이 그토록 아끼던 화분을 자신의 학교 마당에 심는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의 신세가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영화 <레옹>은 지독히도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인생에 기어코 영향을 끼치고 마는 결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한 남자가 오랜 시간 묵혀둔 성장통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년시절이 제거되고만 소녀에게 고스란히 선물된 채 떠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된 채로. 어쩌면 그로 인해 우리는 마틸다가 레옹이 아끼던 화분을 묻은 후 스팅의 ‘Shape of My Heart’가 나오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레옹>이후 나온 숱한 아류작에도 종종 감동받은 이유 역시, 그와 같은 연장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