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하루를 마치고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와 반려견이 있는 집이란 얼마나 아늑한가. 같은 침대에서 잠들어 같은 이불을 펼치고 일어나는 모습은 신혼의 단꿈을 그대로 재현한다. 안락한 나의 주거공간이 한순간에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는 영화는 <잠> 외에도 여럿 있었다. 한 예로 영화 <숨바꼭질>은 타인이 나의 안락한 집에 침투하였다는 공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만약 단순히 '공간'이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 사랑하는 나의 배우자라면 어떠할까. 영화 <잠>은 <불신지옥>과 <곡성>에서 묻는 믿음에 관한 질문을 관객에게 다시금 던진다.
신혼부부인 수진은 남편의 몽유병이 점차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남편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제 갓 태어난 딸의 안위마저 걱정될 정도이다. 이런 수진을 바라보는 남편 현수는 그저 미안할 뿐이다. 수진의 엄마는 무속신앙에 기대어 해결하길 바라지만, 수진은 이에 코웃음 칠 뿐이다. 영화 <잠>은 총 3장으로 나뉘어 극이 전개된다. 1장에서는 몽유병이 공포로 다가오며 2장에서는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고, 3장에서는 카메라가 쫓는 인물이 뒤바뀌듯 극이 전개된다.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할 수 없는 수진의 피로감은 그녀의 충혈된 눈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스릴러였던 영화는 수진의 눈이 충혈될수록 장르의 전환을 꾀한다.
영화 <잠>은 결말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품으로 이는 한줄평을 얼추 살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거치고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꽤나 많은 복선을 깔아 두었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분명 열린 결말로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 관객들은 현수와 수진이 되어, 과학과 초자연에 나뉘어 결말을 상상한다. 열린 결말이라고 보기엔 꽤 문이 닫혀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감독은 애당초 이 영화를 구상할 시 닫힌 결말은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몽유병을 과학적이지만 꽤나 그로테스크하고 오컬트적으로 그려냈기에 꽉 닫힌 결말이 도리어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영리한 선택을 하되 갑작스럽게 뒤통수치는 결말이 되지 않도록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영화 <잠>은 장르적 재미로는 오컬트와 스릴러를 넘나들지만, 결국 믿음에 관한 질문이다. 초자연을 믿을지 과학을 믿을지에 대해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을 지에 관한 물음이자 대답이기도 하다. 현수는 자신의 방법대로 수진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말을 내었으니, 어찌 본다면 이는 주어진 선택지를 벗어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내린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믿는다는 것에서 시종 둘이 함께 고비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수진의 대사가 예사롭지 않다. 더불어 현수가 수진을 사랑하듯 수진이 벌이는 행동의 기저에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 이 영화는 어쩌면 멜로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멜로적 장르에서 본다면 희극일 수도 있겠으나 한 장르로만 구분 지어 본다면 몹시 비극적이다. 오컬트로 보아도 결국 인간이 굴복당했다는 것에 비극적이기도 하며, 스릴러로 본다고 하더라도 과학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멜로, 스릴러, 오컬트가 고루 섞인 이 영화의 결말이 열린 결말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영화를 장르적으로 단정 지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말로 인하여 작품자체가 몹시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이 영화를 오락적으로 바라본다면 잘 만든 놀이기구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