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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15. 2023

<오펜하이머> 최선이자 차악에 대한 딜레마

아내가 암에 걸린 하인츠라는 한 남자는 어느 약사가 개발한 신약이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약의 원가는 200달러였으나 약사는 10배 높은 2000달러를 하인츠에게 제시하였고 그는 최선을 다하여 돈을 마련하였지만 이내 역부족이었다. 약사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자 하인츠는 결국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몰래 약을 훔친다. 하인츠는 약을 훔쳤기에 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약사는 10배 높은 약값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약사 때문에 아내가 죽게 된다면 약사를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비난이 정당하다면, 그리고 아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약사를 더 무겁게 처벌해야만 하는 것일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58345&docId=3431806&categoryId=58345)


위 가설은 하인츠 딜레마이며, 미국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렌스 콜버그가 연구한 자료의 일부이다. 사람은 언제부터 불법적이지만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에 의문을 품고서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과 도덕심에 대해 탐구한 그는 연구를 위해 위와 같은 가설을 제시하였다. 영화의 원작은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전기서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며,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죄로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당한 신이다. 이동진기자는 자신의 유튜브에서(실제 '오펜하이머'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원작 평전 총정리]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YouTube)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줌으로써 축복과 해악을 동시에 전한 인물이라 말했다.


프로메테우스와 하인츠 모두 각자의 최선을 선택한 인물이며 두 인물은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감내해야만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대신 고통을 감내해야 했으며, 하인츠는 아내를 살리는 대신 약을 훔치는 범죄를 저질러야만 했다. 오펜하이머 역시 자신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선택한 차악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소 소장을 맡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담았다. 영화는 다이애나비의 전기영화였던 <스펜서>와 같이 특정한 시간대를 설정한 이후 인물의 회상을 통해 시간대를 넘나들며 극을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철저히 다이애나비의 심리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스펜서>와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그와 대립했던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입장을 넘나들며 그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그리되, 그의 불안한 내면과 죄책감을 표현하고자 한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워낙 방대한 전기서를 원작으로 한 작품인 만큼 크리스토퍼 놀란은 극 중 시간대를 설정하여아만 했는데, 영리한 그의 선택이 3시간이나 되는 러닝타임을 속도감 있게 이끈다. 오펜하이머가 비밀정보 접근 권한에 대해 심의받는 청문회,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가 답변하며 회상하는 과거, 루이스 스트로스가 상무장관 지명이 걸린 상원 청문회를 받는 과정으로 총 3가지 시점이 연속되며, 컬러로 회상되는 오펜하이머의 주관적 입장은 오펜하이머 개인을 그리고 흑백으로 표현되는 루이스 스트로스의 입장은 오펜하이머의 이면을 보인다. 시간순으로는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문회가 가장 마지막이지만 주로 과거를 표현하는 흑백이 연출됨으로써 시간대를 분명히 구분함과 동시에 스트로스라는 인물의 구시대적인 사상을 더불어 표현하였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더불어 한 천재과학자의 딜레마와 그가 감내해야 할 죄책감을 보여주기 위해 시종 대비를 보이는 작품이다. 미래는 흑백으로 과거는 컬러로 표현하는 것과 더불어 굉음을 정적으로 표현하며 일상적인 소리는 머리를 울리는 소음으로 분한다. 그의 불안한 심리를 내포하는 광채는 눈이 부시는 광명이 아닌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통증과도 같다. 마치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그리되 그를 마냥 동정하지 않는 영화의 입장과도 같다.

실제 오펜하이머는 종전 이후 평화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며 수소폭탄을 반대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입장은 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가 종전 이후 보인 행보만이 그의 속죄를 짐작할 뿐이다. 죽임으로써 살려내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한 인간으로서 번민한다. 최선의 탈을 쓴 차악과 최악의 탈을 쓴 차선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야만 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떤 선택을 하며 또 어떤 것들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감내하지 않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선택 이후 직면할 것인가 혹은 회피할 것인가. 영화 <오펜하이머>는 한 인간의 축복할 수는 없는 성공을 통하여 윤리적 딜레마를 관객에게 던진다. 그 답은 관객 스스로만이 답할 수 있기에 영화는 그저 사례만을 제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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