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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 맨: 레제편> 500일의 레제

by 사서 유

최근 극장판을 뒤흔든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만 같을 뿐 몹시도 다른 작품이다. <귀멸의 칼날>이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클리셰를 따라가는 작품이라면 <체인소 맨>은 소년만화보다는 되려 로맨틱코미디와 일본의 서정적인 로맨스를 떠오르게 만든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도 최고의 로맨스영화라고 손꼽았던 <500일의 썸머>를 본 사람이라면, 흔히 '찌질하지만 순애보를 간직한 모솔 남자주인공'의 모습을 덴지에서 보았을지도 모른다. 투명한 남자주인공에 비해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종 물음표로 가득했던 썸머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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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 맨: 레제편>는 앞서 말하였듯이 남자주인공이 연애경험이 부족한 로맨스영화의 양식과 흡사하다. 여자경험이 없어서 조금의 호의도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는 순애보를 간직한 모솔 남자주인공과 그에 비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알 수 없는 여자주인공. 남자주인공은 미처 채 알아차리지 못한 여자주인공의 본심과,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결말까지. 영화의 성격은 레제가 본래의 목적을 드러내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본격적인 액션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본의 여타 다른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을 떠오르게 만든다. 잔잔하게 깔리는 OST하며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하게 그려지는 두 사람의 데이트신만 때어놓고 본다면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에 가깝다. 굳이 비유해 보자면 이 영화의 결말 역시 여타 다른 소년만화장르보다는 느와르에 조금 더 가깝다. 가질 수 없는 평범한 것들을 꿈꿔본 주인공의 쓸쓸한 말로와, 끝끝내 알 수 없는 진심까지도.


그와 더불어 신체가 곧 무기인 본인의 장기를 그 누구보다도 잘 활용할 줄 아는 레제와 그에 비해 다소 투박하고 본인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덴지의 액션신은 이 둘의 캐릭터성을 더욱 잘 드러낸다. 앞서 장황하게 이 영화의 장르는 소년만화라기 보다는 로맨스에 가깝다고 말한 것도, 둘의 결투는 덴지의 각성이 아닌, 오로지 레제를 향한 덴지의 순정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폭탄 그 자체인 레제를 물속으로 껴안고 함께 익사를 택한다는 점에서 덴지의 순수하리만치 어리석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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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지를 죽이려는 본연의 목적을 깨닫고 이에 임하던 레제는 그런 덴지의 마음에 살의를 잃어버린다. 정확히 말하면 살의를 '잃었다'기 보다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평범한 삶을 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레제의 마음을 영영 알지 못한 채 끝나는 이 둘의 결말을 두고 기몽초의 유튜브댓글에서는 레제가 마치 첫사랑 그 자체와도 같다고 말했다. 홀연히 나타나 온 마음을 헤집어놓고 다시 상처만 남기고 떠나는 첫사랑의 속성이 레제와 닮았다는 것이다. 그 댓글 한 줄이야말로, 레제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앞서 모든 시리즈물을 봐야지만 이해되는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과는 다르게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한 듯 보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레제'이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은 팬들은 원작보다도 극장판 속 레제가 더욱 아련하게 남는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레제와 덴지의 앞선 장면들의 서정성 때문은 아닐까. 영화의 포스터에서는 레제 옆에 '아무도 모르는, 소녀의 마음'이라고 적혀있다. 애당초 고독한 레제의 인생에서 평범한 소녀가 될 수 있던 그 순간은 덴지와 함께였기에, 덴지가 모르는 레제의 마음을 다른 이들은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원미상의 여성 사망자를 뜻하는 'jane doe'가 레제편의 OST 제목인 것 역시 감독이 얼마나 레제라는 인물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평범한 삶의 필요성에 대해 줄곧 말하던 레제가 실은 그 누구도 평범하게 살지 못했다는 점이, 그녀의 결말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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