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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25. 2022

번외 - 지터벅의 졸업과 그 이후

1막 5장.

1. 


졸업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며칠간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마저 들었다. 뜻 모를 허탈감에 한숨을 한 번 쉴 때, 문득 몇 달 전 집들이에서 아끼는 후배가 내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형, 요즘 어떻게 지내요?"

"그냥 매일 똑같은 삶이지 뭐. 아침에 일어나 영어 공부 좀 하다가 운동 가고 돌아오면 독서 하고 글 쓰고 생각하고 그러다 일을 시작하지."

"새로운 모임이나 다른 건 안 하세요?"

"응. 알다시피 예전에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걸 즐겼는데, 이제는 그보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어떻게 충실히 하루를 살아가느냐가 중요해졌어. 사람을 만나도 내 일상을 깨뜨리는 새로운 모임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보다 그 일상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고."

이렇게 말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는데, 스윙을 배우고 그 안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한주의 저녁 시간을 통째로 빼서 춤 연습을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다시는 공연 연습을 하지 않으리라.' 서글픈 마음에 이런 다짐을 하면서도 달콤했던 추억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공연 영상을 돌려본다. 밀물처럼 올라왔다가 썰물처럼 훅 빠져나간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던 그 일주일의 결실이 그곳에 있었다. 5분의 짧은 시간이 그렇게 끝나고 나면, 길고도 짧았던 여러 동기들과 쌤과 돔들과 함께한 두 달간의 기억이 어설프게 떠오른다. 어색한 인사와 어색한 동작으로 첫 스텝을 떼던 때, 새로운 단톡방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반갑게 아침 인사로 서로를 맞이하던 때, 어색하게 서로의 손을 맞잡았던 때, 아직은 자신의 배움이 부끄럽고 어색해 누군가에게 홀딩도 못 하고 그저 바라보던 때, 술자리에서 자기소개하던 때, 여러 번개 모임들, 어둑해진 저녁에 조금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숨기며 서로를 주차장까지 느린 걸음으로 배웅해주던 그때, 누군가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어줄 때, 연습으로 지쳐 있으면서도 서로를 다독이던 그때, 그 모든 시간과 공간에, 누가 보면 헤프다 싶을 정도로 웃음이 있었다. 그 웃음이 모두의 얼굴에 아로새겨졌다가 재즈 음악을 타고 흘러와 나도 모르게 웃고 만다. 그 웃음을 나눠준 게 고마워 뭔가 더 아껴주고 싶고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왜 나는 너를 생각할까?' 

우정과 사랑의 근본 개념이 '나는 너를 생각한다.'라고 한다면, 문득 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인용해 '시간의 점'이라는 말을 꺼냈다. 일반적으로는 수많은 시간 중에서 자신에게 의미가 되는 시간 혹은 그 시간에 떠오르는 기억을 말하는 건데, 거기서부터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는 시간의 점 안에 그 사람이 중요한 의미로 자리하게 되고 경험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즉,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떠올릴 때 그 시간의 점이 떠오르거나 반대로 시간의 점이나 그 시간의 점에 존재한 무언가를 일상에서 발견하게 되면 역으로 그 시간을 건너뛰어 그 존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친구나 연인이 잘 떠오르는 까닭도 함께 공유한 시간의 점이 많아서 일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불과 며칠 동안의 사랑이었지만 서로 목숨을 바칠 수 있던 까닭도 그들이 공유한 시간의 점이 무수히 많아서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들과 짧은 시간 안에 무수히 많은 시간의 점을 공유한 것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이별 아닌 이별의 감정을 어설프게 느끼며, 물론 이보다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치 사랑하는 상대가 떠난 것 같은 허탈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결국 다시 이런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다신 공연 같은 거 하지 않을래.'

'다신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을래' 같은 허황된 노랫말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다짐을 한다. 심한 폭풍 이후 나오는 체념 같은 이 말은 생각으로만 맴돌다가 결국, 흔하게 내뱉는 깊은 한숨처럼 되고 만다. 이런 점 때문에 내가 일상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이 마지막의 달콤하고도 씁쓸한 뒷맛의 여운이 서글퍼 그랬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노희경 작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글이 떠올랐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 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재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나에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문득 난, 노희경이라는 작가가 지독한 보호 본능에 시달린 까닭이 어쩌면 그 또한 그런 사랑이 파괴할 일상과 그 이후 느낄 공허함을 알기에 스스로 가벼워지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평온한 일상의 모든 걸 변화시킬 열정적이며 몰입적인 사랑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사랑이 줄 변화와 이별의 두려움이 너무 컸던 것이다. 

조금은 지루하고 단조로웠으나 평온했던 일상이 깨지고 내 시간을 졸업 공연과 그 안의 사람들에게 내맡기자 나는 행복해졌다. 그러나 반드시 와야만 했던, 이 시간에는 그에 못지않은 허전함이 있었다. 다시는 이런 것 따위는 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만 하고 싶어졌다. 

'다음에는 그저 가볍게만 하자. 빠져나갈 틈도 만들어놓고 나를 지키자.' 

내 마음 한편에는 노희경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또다시 그 행복을 갈망하며 모든 걸 내던지는 한 여자가 있었다. 


2.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시간의 점에 관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일부 발췌》


19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간의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노희경 작가의 그녀 역시 그러한 힘이 있었기에 쓰러지지 않고 계속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의 점들을 이어 붙여 영원을 수놓을 하나의 별자리를 천천히 그러나 계속 만들어 보려고 한다. 모든 별자리에 각각의 사연이 있듯이, 시간의 점을 이은 별자리에도 어떤 사연이 붙을 것이다. 첫 만남의 점, 만나서 함께 하던 시간의 점, 함께 공연 연습을 하던 점, 서글프지만 이별을 준비하던 점, 그 모든 점은 다른 점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무수한 밤하늘의 별들처럼 우리의 기억을 수놓을 것이다. 

눈을 감고 두 달 동안의 시간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이 있다. 그 눈망울 하나하나가 내게는 값진 시간의 점들이다. 내가 그런 시간의 점들을 가진 것만큼 각자의 눈 속에는 또 다른 무수히 많은 시간의 점들을 창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을 비롯한 내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타인의 시간의 점들을 발견하게 될 때, 나는 우주의 경이로움을 발견한 듯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따금 타인의 음성으로, 이미지로, 글로, 웃음과 몸짓으로, 그리고 아주 때로는 서글픈 미소로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적는 이 이야기들과 생각은 바로 그 점들을 잇는 여러 노력 중 그저 하나일 뿐이다. 

늘 그렇듯이 모임이 계속되는 와중에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또 새로이 만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인생의 갈림길에서 이 길을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모든 것을 잊고 언제 이것을 했냐는 듯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때, 바로 이러한 기록들이 나를 비롯한 떠나간 이에게 커다란 추억과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가장 서글픈 어느 저녁에, 

밤하늘의 빛나는 별자리의 일부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당신이었음을, 

결국엔 알아차리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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