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고 혈기 왕성했던 시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따금 지금도 감정이 요동칠 때가 있었다. 어떤 원인을 꼽기엔 정말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 근접한 어떠한 일들이 원인이겠거니 탓을 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다른 때는 불쾌한 경험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그것과는 상관없는, 실은 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내 과거의 잘못들을 떠올리게 하고 미래를 망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행이었던 것은, 이 모든 감정이 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라는 것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오랜 반복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단 것이었다. 중요한 건, 그저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감정은 씻겨 흘러갈 것이며 기억은 잊혀질 일이었다. 충실히 할 만한 것조차 없었더라면 난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사랑하지 못하니까 사는 거에 집착하는 거 아녜요?"
홍상수의 영화의 한 대목에서 김민희는 매몰차게 이런 말을 상대에게 건넨다. ‘혹시 나는 시간의 여백을, 살아가는 걸로 채우고 있는 걸까?’ 저 영화의 저 대목을 본 날, 온종일 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나는 사는 일에 집착하는 걸까?’ 그런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날 하루 충실히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걸 누구도 집착이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저 말은 나를 어느 부분에선 뜨끔하게 만든 건 분명했다. (뭐, 뜨끔한 것 이외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는 지켜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리도 안 좋은데 괜찮겠어요? …….”
“괜찮아요. 많이 좋아졌어요. 이번에는 반드시 할 거예요.”
아직은 아물지 않은, 통계적으로 수술 후 1년은 재활해야 한다던 내 다리를 보면서 안쓰러운 듯 누군가가 말했다. 마음이 옹졸해져 있을 때였기에 그러한 호의조차도 ‘졸공에 리더가 너무 많으니, 리더가 적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내 마음의 문제였을 게 분명했고, 이럴 때일수록 약간의 침묵과 겸손, 그리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했다. 실수는 입에서 비롯되는 법이며, 그럴 때마다 속으로 ‘침묵은 금이요, 시의적절한 말은 은이다.’라는 걸 뇌까리곤 했다. 그저 잘 듣고 나에게 좋은 건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건 흘려 버리면 될 일이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할 거다! 누가 뭐라고 해도 꼭 할 거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언제나 누군가에게 양보하던 나였는데, 이번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호감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면 쉽게 마음을 놓아버리는 게 나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내게 있다고? 빼앗기고 싶지 않고 노력하여 쟁취하고 싶다고? 스윙 댄스를 하면서 내게 그런 욕심과 감정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된 까닭들이 있긴 했다.
언제 한 번 어떤 이유로 졸업 공연을 못 한 적이 있었다.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여러 이유가 있었기에 못했지만, 말없이 지켜만 봐야 했을 때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겉으론 판단이 어려운 멜랑꼴리와도 같은 기분이 며칠간 지속됐다.
그때 배운 바가 몇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나 자신이 내 권리를 행사하려 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 대신 내 권리를 찾아주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첫 번째야 물론 졸업 공연을 하지 못한 것 그 자체에 대한 깨달음이었다면, 두 번째 것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이후에 졸공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가까운 어느 누군가가 그 기분을 헤아려 주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실은 여러 이유를 들어 동료들과 함께 졸업 공연을 하지 못한 걸 웃으며 괜찮다고 합리화했지만, 그 사람이 해준 위로를 통해 나 자신의 진짜 감정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한 경험이었지만, 내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안타까워 해줬던 그 친구에게 지금도 고맙다. 여하튼 내게 있어 졸업 공연의 의미는 수업의 갈무리일 뿐 아니라 성장을 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더구나 무릎 수술 이후 처음으로 다시 하게 된 졸업 공연이었으니, 나는 그걸 결코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졸업 공연이었다. 이 졸업 공연을 위하여 몇 날 며칠을 연습하고 나면 뭔가 좀 더 나아진 내가 기다리고 있을 믿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수업을 들으면서 꾸준히 연습했던 동작들이 점점 소셜 댄스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태껏 스윙 댄스를 배우면서 지금이 가장 많은 고민을 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썼다. ‘어떻게 하면 이 동작을 잘할 수 있을까? 이 동작의 원리는 무엇일까?’ 스스로 물어보고 또 누군가를 붙잡고 계속 연습했다.
“이걸 잘하는 법은, 졸라 많이 하면 돼. 수만 번 하면,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와요.”
미오새 쌤은 수업에서 핏대를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듣기에 따라선 당연하다 싶은 그 말이, ‘나는 더 재밌게 즐기기 위해서, 내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들어온 한 명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천 가지의 발차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의 발차기를 천 번 연습한 사람은 무섭다.’
무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소룡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이 스윙 댄스에서만큼은 한가지 동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적어도 천 번 이상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스윙 댄스는 혼자 할 수 없는 것, 파트너가 필요하고, 도와줄 누군가와 합을 맞춰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붙잡고 꾸준히 연습하는 건 그 사람의 소셜 시간을 빼앗는 거라 생각해 항상 미안함이 따랐고 그렇다고 혼자 배운 동작을 연습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섀도복싱을 하듯이 스윙 댄스도 혼자 연습을 할 수 있어. 파트너가 없으면 혼자 연습을 해봐. 나도 그렇게 하는데 뭘.”
수업이 끝난 어느 날 나는 앉아있는 쌤에게 가서 혼자서 연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도 알고 있던 말이었지만,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던 바로 저 말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스윙 댄스를 익히는 한 가지 방법을 확실히 익히게 되었다.
“잘하고 싶으면 소셜보다도 거울 앞에서 가서 계속 연습해봐. 소셜 100번 해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늘지 않아.”
훗날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해주었는데, 평소 연습을 좀 더 중시하던 내게는 이 말 역시 나의 연습이 헛된 게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기도 했다.
두 달간의 이들의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하게 된 패턴도 있었고 또 처음으로 시도해 본 일들도 있었다. 귀중한 패턴을 배웠던 것보다도 더 내게 남은 게 있다면 연습에 관한 새로운 시도들이었다. 새로운 시도들을 나열해 보면 대략 이랬다.
첫째는, 두 쌤들을 정말 많이 귀찮게 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겠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쌤들에게 꼬치꼬치 캐묻기가 매번 미안했다. 그 까닭은 내가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된다는 생각과 수업이 끝나고 쌤들도 춤을 추는 소셜 시간에 물어보는 건 그들의 자유 시간을 빼앗는 무례한 짓이라는 생각이 커서였다. 그러했기에 쌤들이 자유롭게 있는 시간에 잠깐 가서 가볍게 물어보는 일이 많았고, 한번 물어보고도 안되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인 것마냥 흘려버리는 게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된 까닭은 선생님들이 보여준 열의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잘 안되는 건, 수업 끝나고 거울 앞으로 와요!”
이렇게 수업 시간에 이야기 해주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안되던 것들을 물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하나 신경 써서 봐주는 진정성이 서로의 거리감을 좁혀 물어보는 행동 그 자체를 거리낌이 없도록 했다. 물어보는 것 하나에도 크고 작은 마음을 먹지 않고 스스럼없이 달려가 물어보는 행위, 그게 얼마나 수강생들에게 큰 힘이 되는지 쌤들은 알고 있었을까? 이 말을 어느 팔뤄에게 하자, 그녀는 리마쌤에 관한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 기억 보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아마 이런 대화였던 것 같다.)
“내가 한번은 리마에게 어떤 게 잘 안되서 카톡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거든. 그랬더니 엄청자세하게 알려주는 거야. 안되는 부분 하나하나, 심지어 영상까지 찍어서 말이지. 나 그거 보고 완전 감동했잖아.”
실로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람의 인상이 순식간에 바뀌는 순간이었다.
물론 물어보는 일도 신경 써서 했는데, 무엇보다 안되는 부분을 계속 연습해서 어느 부분이 잘 안되는 건지 구체적으로 만드는 게 필요했다. “다 몰라요!”라고 질문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 앞에 가기 전까지 안되는 부분을 꾸준히 연습해보고 파트너와 함께 의견 교환을 해본 뒤, 질문할 것들을 모아 가져갔다. 그러고 나서 피드백을 받은 뒤에는 다시 연습해보고 제대로 되는지, 좀 더 미세한 차이를 가져가 물어봄으로써 문제가 있는 범위를 좁혀가거나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할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었다.
둘째는, 한계를 정하지 않고 연습한 것이다.
그전에는 수업 이후에 바로 소셜 시간이었기 때문에, 대체로는 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어느 정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소셜 댄스를 하며 나머지 시간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두 쌤의 첫 수업 이후, 기존에 보지 않았던 새로운 패턴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걸 소셜에서 해보려 했으나 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일이면 분명 다 까먹는다.’ ‘지금의 내 사정으로는 따로 누군가와 날을 잡아 연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소셜 때 억지로라도 해봐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노래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나아가 소셜 댄스 자체를 힘들게 만들었다. 1주 차 수업이 그렇게 지나고 2주 차부터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 도와달라고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빠닫 전까지 수업 과정을 다 익혀서 영상으로 남기는 게 목표였다. 다행히 지터벅 첫 선생님이었던 임미가 소셜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나를 기꺼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내가 다 외우지 못해서 이 친구의 소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는구나.’ 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 속을 맴돌았다. 수업 내용을 다 외우지 못한 상태에서 연습하려니 쉽지 않았고, 계속 틀리는 통에 그녀가 소셜로 즐길 시간을 빼앗은 게 미안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영상은 잘 찍었으나, 다음 주가 되니 머릿속에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4주 차에는 수업 내용을 그 전에 70~80% 이상을 외우려고 노력했다. 영상을 계속 보고 글로 동작을 써본 뒤 외워보기도 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익혔다. 그러고 나서 쭈 누나에게 대놓고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누나! 나 좀 도와줘요. 나 오늘 소셜 안 하고 계속 연습할 건데, 그래도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실로 처음이었다. 7시부터 11시까지 연습만으로 채운 건. (사실 그래서 졸공 곡을 선정하기 전에는 4주 차 수업 과정은 어느 정도 익히고 연습했던 터라, 5주 차 노래와 안무가 졸공용으로 뽑히길 바랐다.)
세 번째는, 평일에 혼자 그리고 때론 함께 가능한 시간에 연습한 것이다.
“낮에 연습하려고 하는데 시간 되시는 분 계신가요?”
저녁 시간이 안 되기 때문에 함께 연습하기 어렵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없으면 혼자 라인 댄스 연습이라도 할 겸 혹시나 싶어 단체 방에 글을 올렸다. 때마침 쥰경 누나가 시간이 된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내가 가능한 시간에 함께 배운 동작들을 연습할 수 있었다.
네 번째는, 나를 객관화하려고 노력하고 또 영상으로 촬영한 것이다.
“미오새 형이 말한 것 중에 명언이 하나 있어요. ‘거울 앞에서 서서 춤을 추는 내 모습이 구려 보이면 진짜로 구린 것이다’라고요.”
엽님은 어느 날엔가 미오새 쌤이 한 명언이라며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깔깔 웃어댔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이 말이 춤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점검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거울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계속 보고 고쳐나가려면, 영상으로 촬영하고 반복해서 보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느 정도 연습 동작들이 완성이 되고 나면 영상으로 찍어보는 것을 반복했다. 특히, 쥰경 누나와 낮에 둘이서만 연습을 해야 할 때는, 쌤이나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고쳐줄 사람이 없었으니, 촬영하고 스스로의 모습에 피드백을 해보는 게 정말 중요했다.
마지막으로는, 처음으로 수업 중에 동작을 다 외운 일이었다.
쌤들은 2시간 동안 대략 12~15개 정도의 동작을 차례대로 이어나갔다. 그 방식은 수업 중에 1번 동작을 익히고 반복, 2번 동작을 익히고 1번과 2번 동작을 붙여서 반복, 3번째 동작을 익히고 1~3까지 반복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익힐 수 있었고 끝내는 모든 동작을 비교적 쉽게 암기할 수 있었다. 물론 고비는 7~8번째 이후의 동작이었다. 단기 기억은 그 정도에서 한번 뚝딱거리기 마련이었고 그런 고비가 올 때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쉬는 시간은 내게 최고의 복습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배운 곳까지 가까운 팔뤄들에게 물어봐 가며 익혔고 잘 안되는 동작은 스스럼없이 두 쌤들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고 나는 끊임없이 작게 입으로 카운트를 세어가면서 동작을 익혔다.
“카운트를 세어가면서 익혀보도록 노력하세요.”
이따금 라인 동작 등을 가르칠 때, 엽님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다 보면 숨이 차거나 혹은 몇몇 이유로 카운트를 잊거나 놓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는 번번이 카운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굳이 카운트를 세지 않아도 음악과 동작의 매칭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진 않았다. 또한,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을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카운트를 세어가며 가르치는 연습을 할 필요도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카운트를 세어가는 것도 익숙해지자, 전처럼 숨이 차지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쌤들이 준비한 안무와 음악이 얼마나 절묘하게 떨어지는지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과 동작이 일치하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구나!’ 수업 이후에 영상으로 찍은 그들의 동작을 음악과 카운트에 맞춰서 보니 쌤들의 동작 하나하나의 세심한 디테일이 엿보였다.
수업 중에 동작을 다 외우고 나니, 팔뤄들과 수업 연습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물론 단기 기억으로 저장된 거라 빠르게 잊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 전보다 훨씬 빠르게 복기를 할 수 있었으며, 소셜 시간을 좀 더 할애해 다른 이들과 즐겁게 춤을 출 수도 있었다. 물론 그날 배운 걸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교류하는 재미까지도 잡을 수 있었다는 게 고무적이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분명 실로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쌤들, 아낌없이 도와주었던 돔들, 그리고 수많은 리더와 내 연습 파트너가 되어준 팔뤄들…….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연습이 부족해서라고. 물론 그게 완전히 맞는 답이라고 보진 않지만, 연습량이 많으면 동작이 부드럽게 나오거나 실수를 할 일이 적게 되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졸업 공연을 할 때도, 그래서 그랬던 것인지 전혀 떨리지 않았다.) 4주 차가 되던 그날, 4시간을 쉼 없이 연습하고 그 이후에도 별도로 연습실을 빌려 평일에도 연습하면서, 안되던 동작이 소셜에서 자연스럽게 되고 자신감이 생겼을 때, 그가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걸 잘하는 법은, 졸라 많이 하면 돼. 수만 번 하면,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와요.”
4주차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어쩌면 난 어느 팔뤄의 시간을 모조리 다 빼앗았을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할 리더들의 기회도 빼앗은 셈이니 어쩌면 누군가가 생각하기에는 이기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을 법하다. 혹시라도 그때 일로 하여금 불쾌한 기분을 느낀 분이 혹시라도 있다면 이 글을 통해서 사죄를 드리고 싶다. 다만, 그때의 새로운 시도와 경험들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건 분명했다. 그때의 연습을 통해 내가 가진 기술의 폭이 넓어진 것뿐 아니라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할지에 관한 길을 좀 더 확장 시켜주었고 어떻게 쌤들의 멋진 기술을 훔쳐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의 폭을 열어주었다랄까?
며칠 전 인터넷 쇼츠를 보다가 국어 학습 방법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사회 윤리 과목을 가르치는 이지영 강사였다. 영상에서 그녀는 혼자서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 가며 하고 있었다. 대략 정리하면 이런 말이었다.
“국어는 솔직하게 얘기하면, 제시문을 읽을 때 90퍼센트를 입력해서 다시 제시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문제를 읽는 사람이 제일 잘하는 사람이야. 그러기엔 제시문이 너무 긴데요? 그걸 어떻게 읽으면서 머리에 입력해요? 그럼 잘하는 사람들은 그걸 입력해서 다시 제시문 찾아가지 않고 풀어요? 어.”
“그런 경지가 가능해요? 어!”
“그런데 너희가 그러려는 시도를 지금까지 안 해보기 때문에, 자꾸 국어 수업을 들으면서도 문제를 혼자 읽어도 잘 모르겠고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고… (중략) 지금부터 부탁이 있는데, 매일 좋은 기출 제시문을 문제와 상관없이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해. 입력하는 연습. 글을 읽어서 90퍼센트 이상 내 머리에 홀딩하는 연습을 해야 해. 그러려면 천천히 읽어야 해.”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영국의 속담처럼, 나는 국어에 관한 저 말을 스윙 댄스 연습에 관한 설명으로 치환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수업을 들을 때, 수업 마무리 지을 땐, 90퍼센트를 입력하고 시도를 해보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야. 그러기엔 수업 내용이 너무 긴데요? 그걸 어떻게 수업을 들으면서 머리에 입력해요? 그럼 잘하는 사람들은 그걸 입력해서 까먹지 않고 해결해요? 어.”
“그런 경지가 가능해요? 어!”
“그런데 너희가 그러려는 시도를 지금까지 안 해보기 때문에, 자꾸 스윙 댄스 수업을 들으면서도, 패턴을 혼자 해봐도 잘 모르겠고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고… (중략) 지금부터 부탁이 있는데, 매일 좋은 패턴과 내용을 수업과 상관없이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야 해. 입력하는 연습, 수업 내용을 보고서 90퍼센트 이상 내 머리에 홀딩하는 연습을 해야 해. 그러려면 천천히 동작을 해봐야 해.”
이렇게 그 내용을 치환하기에 이르자, 나는 불현듯 깨달은 게 있는데, 이 수업을 듣기 전까지도, 나는 단 한 번도 수업 내용을 완벽하게 외워보겠다, 혹은 수업 시간에 90%가량 익혀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크게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러려는 시도조차도 안 해보고 있었다. 혼자 해봐도 모르겠고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니, 그냥 웃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복습했던가? 졸공이 아니면 연습이나 복습을 따로 해본 적이라도 있었나? 좋은 패턴 혹은 수업에 관한 연습을 충실히 했던가? 그리고 그걸 배우고자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연습을 해봤던가? 나는 어쩌면 연습에서도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며칠 전 동생과 함께 차를 타고 집에 내려가는데, 대화 도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형, 조금은 이기적이어야 하는 것 같아. 내 것을 얻기 위해선.”
나는 내 것을 얻기 위해 이기적이었나? 혹은, 그전까지는 그냥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서 아무런 노력도, 욕심도 내지 않는 사람이었던 건가? 어쨌거나, 이번 2달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계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윙 댄스를 배우던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많이 고민하고 이기적으로 배우고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행복했으며, 또 감사했다.
요즘들어 더욱,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 전체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스윙 댄스라는 일상의 한 부분이 내 삶 전체를 아울러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