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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Nov 14. 2017

인정 투쟁

열 번째 이야기.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남미사랑 호스텔. 남미 여행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한인 호스텔이자 사랑방.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남미 전반에 대한 정보가 아주 잘 정리되어있고, 조식으로 한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남미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의 출발지로 이만한 곳이 없다. 벌써 이곳을 두 번째 방문한 해인을 배려하여 도미토리가 아닌 프라이빗 룸을 제공해준 인심 좋은 사장님 부부는 수많은 투숙객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지나고 보니 남미사랑의 사진이 많이 없다. 사진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 피제리아 구에린

 남미사랑에 짐을 풀고 나니 때는 이미 저녁 식사 시간, 저녁으로 파스타를 해먹을 요량으로 간단한 장을 보는데 남미사랑에서 스치며 눈인사를 나눈 이모뻘 여성분이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식사 준비하시나 봐요? 저희 위에서 다 같이 밥해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해 드실래요?"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우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연휴를 맞아 여객터미널에서부터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한 시간가량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남미사랑까지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무 피곤했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나서는 쉬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계획을 짜야했기 때문에 감사하지만 다음에 함께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호의를 너무 쉽게 거절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 최대한 정중히 말씀을 드렸는데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이상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같이 먹지? 돈 좀 내고 일 좀 같이하면 될 텐데~." 일단 갑자기 말을 놓았다는 것에 한번, 그리고 그 말투에 묘한 불쾌함이 묻어있다는 것에 두 번 움찔했다. 재차 웃으며 다음부터는 같이 먹자고 말씀을 드리고 간단한 파스타용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조리를 할 수 있는 루프탑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몇 날 며칠은 이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는 무리가 서로 어울려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달 넘게 브라질에 있으면서 한국인이라고는 본 적도 없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던 와중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너 이 새끼 일을 왜 안 해? 존나 시키는 대로 안 하네?" 아까 우리에게 식사를 제안했던 이모는 우리 또래 뻘 되는 친구들을 진두지휘하며 전투적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격의 없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이곳에 더 오래 투숙했었나 보다.. 내지는 서로 많이 친해졌나 보다.. 정도의 생각을 하며 우리의 파스타 재료를 옆에서 다듬고 있었다. 그때 그 이모뻘 되는 분이 별안간 우리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거 참 나 같으면 돈 좀 내고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먹겠다. 이렇게 다들 있는데서 옆에서 뭔 고생이야~답답하네 정말~" 호의랍시고 한마디 훈수를 두는 그녀의 예의 없는 한마디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여 명이 넘는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우리를 고고한 척 버티며 안 섞이려고 하는, 사회성 없는 이상한 커플로 만드는 한마디에 그녀를 황망하게 쳐다봤다.


 "그니까 그러지 말고~ 다음엔 같이 먹어요~~." 쿨한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돌아서서 등짝까지 때려가며 우리 또래 친구들을 닦달하는 쿨한 (구린) 그녀의 뒷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잊고 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무슨 사연으로 이곳까지 흘러와 왕언니 노릇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감이 흘러넘쳤고, 이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던지 알바 없는 사람들 앞에서 아주 활기차 보였다. 그들의 밤은 그렇게 저녁부터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산 텔모 시장의 버스킹. 주말을 맞아 구경 나온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관계를 맺고 여행에서도 관계를 맺는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관계들은 대개는 나를 ~~라고 불리게 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노력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이상, 학생이라면 학교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고 직장인이라면 같은 업계의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여행은 그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임의로 섞이는 순간이다. 서로가 하는 일이나 사는 방식을 공유하려 해도 점접이 희미하다면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위계, 관습, 자신을 구성하던 모든 배경들은 해체되고 재조합된다. 우리가 지난 두 달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가 원래 어땠는지를 알아가는데 긴 호흡으로 여유를 둔다. 출신지나 여행경로를 가볍게 물어보고 서로의 여행 경험을 공유하게 되며 느낌, 말투, 사고방식으로 서로를 파악하게 된다. 이후 더 친해진다면 서로에 대해 심도 있는 질문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 만난 모종의 한국인들은 거기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여 자신의 방위를 재빨리 점찍으려 하는 느낌을 준다. 출신지역, 하는 일, 다니는 회사, 학교 등을 가장 먼저 질문하고 알아내 재빨리 어느 위치에 상대를 점찍고 그의 위치와 나의 거리를 재보며 나를 위치시킨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이런 과정이 무의식 중에 재빠르게 진행되고, 그틀안에서 상대를 파악하려 하는 내가 보인다.


 땅은 좁은데 사람은 많아서 이런 식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게 간단해서 자연스레 생긴 절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미국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쯤 되면 서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예 모르거나 관심 밖인 경우도 허다하니까. 하지만 이게 장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애초에 그곳을 떠나 지구 반대편까지 온 거라면 거기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고향의 질서를 가져와 새로운 위계를 만들어서 거기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편이 편한 것 같다. 하지만 얼마못 갈 시한부 관계에서 우리처럼 불리한 기분을 얻는 사람들이 생기고, 또 그렇게 한번 멤버가 생기면 안 그래도 짧은 여행에서 원하지 않는 관계에 시간 뺏기고 돈 날리는 경우를 더러 봤다는 것.


 자세히 보니 테라스에는 굳이 왕언니 무리에 안섞이고 혼자 내지는 두어 명이 식사하는 몇몇의 그룹이 있었다. 해인과 함께 이곳에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용히 파스타를 먹고 우리 할 일을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가로지르는 7월 9일 대로. 남미에서 가장 큰 너비의 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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