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발디비아(Valdivia)
서로 다른 점들이 처음에는 사귀는 이유가 되고, 나중에는 헤어지는 이유가 되는 게 참 웃기다. 좋으려면 모든 이유를 다 갖다 붙이고, 싫으려면 모든 이유를 다 갖다 붙이는 게 바보 같은 커플들이 반복하는 지겨운 패턴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게 부러웠고 함께하는 이유가 되었다가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안 돼 라고 쉽게도 말을 바꾼다.
해인은 불같은 성격이다. 누가 마음에 안 들면 꼭 한번 욱하고, 그 이야기가 당사자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이 화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만큼은 반드시 표현해야 감정이 가라앉는다. 처음에는 그게 해인의 톡 쏘는 매력이었다. 내가 갖지 못한 직관적이고 시원시원한 표현이 부러웠다. 어쩔 때는 과하고 아슬아슬해 보여도 귀여운 외모와 웃는 얼굴이 묘하게 그것을 가렸다. 웬만해선 화를 안 내고 한 번은 접고 가는 내 성격을 큰 키와 짙은 인상이 보완하는 것과 묘하게 대조를 이뤘다. 해인이의 솔직한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래서 화를 내기 어려웠고, 나에게는 아예 함부로 말을 하기 어려운 게. 그래서 우리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렇게 이상적일 수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데 모를 리 없었다. 점점 해인과 사소한 의견 차이가 생길 때, 해인이 너무 과하게 표현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접었고, 해인이는 조금씩 더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칠레로 국경을 넘으면서 우리의 관계에도 새로운 정리가 필요했나 보다. 발디비아의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고 나자 잔돈이 남았다. 환율로 따지면 100원 남짓. 나오자마자 앞에 있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막간 곡예가 펼쳐졌다. 간단한 서커스를 하는 광대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앞에서 저글링을 선보이고 신호가 끝나기 전에 수금 한 뒤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나는 ‘이 동전이라도 드릴까?’ 하고 해인에게 물어봤다. 이 동전 외에 남은 돈은 고액권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동전도 처리할 겸 이 동전을 드리자고 했다.
“진짜 생각 없다. 그건 좀 아니지... 고작 이거 주면 저 사람들 무시하는 거지.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해인의 말투와 표정은 이해할 수 없는 몰상식을 발견한 것처럼 반응했다. 조금씩 쌓여온 것들은 원래 별것도 아닌 것에서 터지게 마련이다. “해인아,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한 말을 했다고 그렇게 사람을 빈정 상하게 해? 그렇다고 이렇게 큰돈을 줄 수는 없잖아. 안 주면 마는 거지 뭘 그렇게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 그랬더니 해인은 재차 말했다. "아니, 너무 생각이 없잖아. 저 사람들을 왜 그렇게 무시해?"
갑자기 해인에게 쌓였던 불만들이 터져버렸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렇게 사람을 바보 만들어? 내가 참다 참다 짜증 나서 같이 못 있겠네. 계속 이런 식으로 다니면 나 너랑 있는 내내 스트레스받을 거 같으니까 오늘 잠시만 따로 다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