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ningHa May 27. 2019

우리 딸이 10년만에
아이를 갖지 않았겠수?

ep04. 10년만에 푸는 엄마의 슬픔 보따리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다가 이 구절에 줄을 긋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공간에서 나를 둘러싼 해결해야 하는 일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복닥복닥 이런저런 사람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냥 지쳤을 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어떻게 보면 표면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 표면에서 좀 더 들어갔을 때 이유를 다시 물어보면, 김영하 작가의 표현처럼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슬픔’에서 자유롭기 위한 것이라는 구절을 읊조리다 작년 임신했을 때 떠난 가족 여행이 생각이 났다.




“내가 왠만하면 그냥 넘어 가려고 했는데, 정말 속상해서 울음이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 하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10년만에 애가 들어섰어, 아이를 가져서 유리처럼 깨질까 걱정되어 전전긍긍 조심하고 있는데 자네들이 그렇게 펄쩍펄쩍 뛰는 새우를 사서 살생을 하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내가 회를 안 좋아 하는가, 회 먹을 줄 알지만 조심해서 날 것을 안 먹으러 조심조심 했는데 자네들은 어찌 그리 생각들이 없는가..그래서 마음이 안 좋았네…….”


여행 온 아침에 이게 무슨 난리인가
엄마가 저리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두 사위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장모님 이야기를 그저 듣고 만 있었다. 엄마, 사위,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의 표정에서 어이가 없지만 간신히 예의 바르게 듣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는 ‘10년만에 애가 들어섰는데…’라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내가 아이를 갖지 않음에, 아니 못함에 엄마가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지 생각이 들며 옆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면서도 귀가 빨갛게 달아 오름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저 듣고만 있는 두 사위가 야속하기만 했다. ‘어머니,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라고 말한마디 해 주면 안되나,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 둘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하는 태도에 어려움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사건인 즉슨, 전날 저녁 바비큐를 할 때 발생했다. 
두 사위들과 10년만에 들어선 아직 뱃속에 있는 손주와 함께 가족여행을 온 엄마는, 기분 좋게 사위들에게 돈을 건내 주며 한우 등심과 자네들이 먹고 싶은 것 장봐오게나라고 했다. 절에 다니시는 엄마는 낮에 불공을 드렸기 때문에 되도록 산 것을 살생하고 싶지 않다 하셨고 회 대신 저녁에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사위들은 고기를 사러 마트로 향했고 이들은 비싼 한우 고기를 사고도 남은 돈을 만지작하다 살아있는 새우를 사왔다. 그리고 바비큐 불 위에 그 살아 있는 새우의 목을 따서 올렸고, 엄마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연신 고기와 새우를 구워 엄마 접시에 올려 두었지만 엄마는 눈이 따갑다며 먹지 않으셨고, 벌레가 문다며 일찍 올라간다 하셔서 그렇게 바비큐 파티는 마무리하고 각자 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 날 아침, 참다 참은 엄마의 하소연이 그러니까 10년만에 터진 것이다.


10년만에 들어선 큰딸의 임신, 
엄마에게는 그토록 듣고 싶던 소원이자 10년동안 애닯던 소원이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을 때, 괜스리 눈물이 나왔다. 왈칵 흐르는 눈물 사이로 엄마 나 임신이래라고 울음을 꿀꺽 삼켜 이야기를 전했다. 건내 받은 엄마 역시 울음을 왈칵 삼켜 축하한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날 저녁 엄마에게 퇴근한다고 전화를 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엄마가 담담하게 잘 들어가라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임신 사실을 듣고 그 때부터 엄마는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고 한다.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저리 일을 하러 가서 힘들면 어떻게 하나 등등 모든 하나하나가 걱정이었다. 그런 엄마가 가족 여행을 가는 길에 들린 절에서 감사의 등을 달아 올리고 조심조심 하던 터였다. 이리 조심하고 있는데 엄마 관점에서는 생각 없는 사위들이 팔딱팔딱 뛰는 새우 목을 따서 불에 올리니 그 자리에서는 뭐라 할 수도 없고, 애가 달았던 모양이었다.


지금 현재에서 잠시 쉬러 가는 것, 그것이 여행에서 바라는 것일 텐데. 현재의 고민과 걱정은 잠시 놓고 쉬러 가는 것, 그것이 여행에서 모두 바라는 것이었는데 엄마는 그 걱정과 고민, 그 고민들로 가득했던 슬픔을 꼭꼭 쌓아서 여행에 보따리 싸 오셨고, 보따리는 구멍이 나서 그간의 슬픔이 쏟아져 흘렀고 그 날 아침 가족들은 그 슬픔을 각자의 방식데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10년만에 아이가 생겼다.

그 10년의 세월동안, 처음에는 일부로 조금 늦게 갖자 했었다. 그리고 이제 갖아볼까 했는데,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생기면 낳자라며 우리 부부는 의연하면서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양가에서는 시선이 편하지 않았다. 

6년차 되었던 해였을까, 슬슬 양가에서는 압박해 오셨다. 뭐 문제 있는 것 아니냐,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 이거 누가 준 한약인데 그렇게 좋다라며 무심한 우리 부부에게 너희는 지금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은 못 가진 것이고 문제가 되는 일이며 바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주시 시켰다. 시댁에서는 오히려 스트레스 받을까봐 직접 이야기를 못하셨는데, 친정 엄마는 달랐다.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꼬집었다. 안 낳을꺼면 딩크족이라고 선언이라도 해라, 그럼 기다리지도 않는다며 나의 속을 마구 꼬집었다. 


그 때즘이었나, 성화에 못이겨 난임 병원에 갔었다. 각자 검사를 받았고, 크게 문제 없지만 나이가 문제라 하였다. 지금 나이면 급하다 했다. 그 때가 36살이었나, 37살이었나. 아직 우린 젊다 생각했고 자연임신을 바라던 우리에게 병원은 처음부터 시술을 권했지만, 3달 정도 배란일을 맞추며 자연임신을 시도했다. 그 3달 동안 나는 인생에서 가장 쓰디 쓴 패배를 맞보았다. 매달 중대한 시험을 보는데, 자꾸 그 시험에서 떨어지는 기분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쿨한 태도로 병원에 갔지만, 사실 배란일 맞추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 하루가 바싹 바싹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결과는 늘 실패, 난 인생에서 실패만 하는 패배자였다. 
누구 누구는 쉽게 하는 임신이 왜 나는 쉽지 않은 것인지 능력 밖의 일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힘들고 무엇보다 그 결과를 기다리는 부모가 나에게는 가장 힘든 대상이었다. 3달동안 시도 끝에 나는 ‘끌려가는 기분이야, 매번 실패하는 기분이야, 우울해져서 미칠 것 같아’라며 병원에 다시 안 가겠다 엄마에게 선언했고 엄마는 아이 없어도 괜찮다 편하게 인생 즐기며 살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마흔살의 새해가 밝았다.
편하게 자연스럽게 생기면 갖자는 우리 믿음은 조금씩 흔들렸고, 각자 회사에서의 스트레스와 피로로 가득한 우리는 노력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38살의 끝자락에 우리 내년에는 병원에 적극적으로 가보자라고 암묵적으로 이야기해왔었다. 나는 병원에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나의 기억 속에 병원은 암흑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넌 패배자야라고 매달 일깨워주던 곳, 그 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 부부에게는 문제가 없데, 아직 인연이 안 온 것이지라며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 한켠에 갖고 있는 불안함과 스트레스였다. 문득 우울해질 때마다 그 이유가 나에게 애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나의 문제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시켜 놓았지만 결국 우울해지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임을, 난 마흔 살 새해 인정하고 말았다. 


나에겐 아픔인데 유리 밖에서 투명하게 보이는데도, 난 일부로 보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는 병원에 갔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의사에게 시술을 원한다고 당당히 이야기했고,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가 있어 급하지만 잘 해보자 하셨다. 몇 년 전에 느낀 그 암흑의 터널보다 밝은 느낌이었다. 물론 병원에 가서 과배란을 위한 주사를 맞고 하는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병원에 다니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운 편이었다. 인공수정 시술을 한번 시험삼아 해 보고, 바로 시험관을 했다. 발걸음이 가볍다고 해서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모든 모임과 약속에는 불참하거나,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어요라고 굳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몇 친구들에게는 나의 고민과 의지를 밝혔다. 올해 나는 임신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 무엇에도 신경을 끄겠다. 온전히 임신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니까 올해 나의 KPI는 임신이다라고 선언을 하고 병원에 다닌다고 당당히 이야기 했다. 병원에 다닌다고 이야기 하는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각자 선입관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몇몇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오히려 그들이 따듯하게 응원을 해 주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 줄 몰랐다며 따뜻하게 응원해주고 위로해 주었다. 병원에 다닌 이야기는 따로 보따리를 한참 풀 만큼이므로 그 과정이 어땠는지는 오늘 이야기에서는 빼기로 하자. 

감사하게도 우리는 한번의 시술로 지금 우리의 소중한 아이를 품게 되었다. 아이가 올 것이라 기대하지 못했고, 삼세번은 시술 할 것을 각오까지 한터라, 한번에 아이가 우리에게 와 주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매번 임신 테스트기에 실패라는 표식을 확인한터라, 두 눈에 두 줄을 확인하고 피검사 수치로 확인했을 때도, 아기집을 확인하고, 난황이 생기고 점차 자궁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도 난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아이를 낳아 품었을 때조차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딸에게 10년만에 아이가 왔잖수…”
요즘 엄마는 이 이야기를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바랬을까 엄마는 지금 할머니가 되어 유모차를 끌고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그동안에 감추었던 큰 비밀을 풀어 낸다. 10년만에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부터 마흔에 아이를 낳는데 순산했다는 등 엄마는 그동안의 큰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냈다. 옆에서 듣는 나는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이야기하실까 생각이 들면서도 ‘아 엄마 좀…그만…이야기 하지?! 동네 소문 다 나네…’라며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어색한 미소로 옆에서 화답을 했다. 하지만 엄마가 굳이 이야기 안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시험관 시술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나는 그 이야기에 솔직한데, 엄마는 굳이 이야기 할 필요 없다는 것이 엄마의 자존심 아닌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있으면 굳이 나도 이야기를 안하는데, 사람들은 굳이 물어본다. 왜 사람들은 남 이야기에 그리 자세하게 궁금해 할까. 결혼을 안했으면 왜 여태 안했는지, 아이를 안 가졌으면 여태 아이가 왜 없는지, 이제 아이를 낳았더니 그 아이가 어떻게 왔는지를 꼭 물어본다. 특히 10년만에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꼭 물어본다. 자연산인지 아닌지 말이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다들 그 통념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그 통념을 따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관심을 과하게 표현하며 그 이유를 묻는다. 쿨하게 그 통념에서 벗어나 살겠다 선언한 경우는 그 질문들을 쿨하게 받아들이겠지만, 그 과정에 아픔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질문에 상처 받거나 피로하기 쉽다. 상대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픔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히려 조심하게 된다. 상대도 혹시 그럼 아픔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한번 더 헤아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가 노바디의 여행 챕터에서 “예의바른 무관심”정도가 현지인과 여행자 사이에는 적당하다 쓴 구절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대화를 할 때 필요한게 바로 “예의바른 무관심”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10년만에 푸는 엄마의 슬픔 보따리
아직 풀지 않은 보따리도 있지만 엄마의 슬픔 보따리의 아픔은 그토록 바라던 10년만에 만난 손녀의 웃음으로 점점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직시하지 않고 한 켠에 묶어 두었던 아픔 덩어리를 비로서 내려 놓는 딸의 시선이 조금은 슬프고 기쁘게 엄마에게 닿는다. 언제 이리 나이가 드셨을까, 엄마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나이의 흔적을 다시금 발견하며 엄마딸로써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 우울증이야? 무작정 나와 걷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