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절정을 맞이하다
Prologue
지난 11월, 초록빛 창덕궁 후원을 방문한 이후 5개월 만에 다시 들른 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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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온 친구에게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한국 궁궐과 전통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벼르고 별렀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 풍경에 오히려 내가 더 홀려버린 느낌이랄까.
겨울이 오면, 눈 덮인 그곳을 다시 찾고 싶단 생각이 새록새록 들던 시간.
창덕궁 산책
이른 아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모두들 마지막 단풍 구경을 놓치지 않으려 모여든 것 같았다.
다행히, 매표소 직원분들의 빠른 손놀림 덕분에 얼마 기다리지 않아 입장할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했다.
창덕궁 초입부터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기 시작했는데
쌀쌀한 공기에도 불구, 인정전에서 본 푸른 가을 하늘은 내 눈과 마음, 가슴까지 탁 트이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후원 관람 예약을 한 터라, 여유 있게 시간이 남은 탓에 창덕궁과 인근 창경궁까지 친구와 함께 걷고 또 걸었다.
내가 아는 얕은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여 친구에게 이들 궁궐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예전엔 창경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땐, 얽히고 설킨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또한 들려주게 되었다.
그 당시,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놀라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후원(後苑)으로
예약된 시간이 되어 후원으로 이동한 우리.
초입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
이제 시작!
후원의 단풍은 그 빛깔이 사뭇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단풍을 만날 수 있는 건지.
햇살이 닿는 곳마다 나뭇잎 색이 조금씩 바뀌어, 그 빛깔에 홀린 듯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11월의 부용지와 주합루는 6월의 푸르른 녹음 속 모습과는 꽤 다른 느낌.
알록달록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부용지를 가득 덮었던 연잎은 사라졌지만, 눈부신 가을 햇살을 등에 업고 연못을 마주한 주합루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후원 풍경 중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들어온 것은 오색빛 나무 아래로 보이는 관람정과 관람지의 풍경.
가만히 서서 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지난 여름, 초록 옷을 입었던 '대왕' 은행나무가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자태를 뽐내던 모습.
내 친구 사만다는 노랑(은행나무), 파랑(하늘), 빨강(단풍잎), 흙색(나무줄기)을 버무리면 '김치'가 될 것 같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사랑스러운 친구 모습에, 예상치 못한 비유에, 나 또한 깔깔웃음으로 답변할 수밖에.
청의정 앞뜰 벼는 가을 추수 후, 다시 심었다고 했다.
초록빛 벼가 청의정 지붕 색, 주변 단풍색과 조화롭게 잘 어울려 보였다.
Epilogue
이른 아침 창덕궁의 공기는 초겨울만큼 차가웠으나, 정오에 가까워질수록 살에 닿는 햇살의 촉감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부드러워,
대만 친구와 함께 한동안 그 햇살 아래 서서, '나무들의 색 잔치'를 즐기곤 했었다.
대만의 뜨거운 태양빛만 알고 있던 그녀에게, 늦가을 한국의 햇살은 따스하고 온화하여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주는 듯했다.
이 땅에 살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햇살의 느낌이 달라지는 걸 이토록 신기해하며 온 몸으로 흡수한 적이 또 있었을까.
그 날, 친구와 나를 포근하게 감싸던 창덕궁 후원에 내린 특별한 햇살,
앞으로도 오랜 시간, 그 느낌을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