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어디에나 있다.
용어가 그렇다. '디자인'과 조합된 말은 무수히 많다.
간판디자인, 거버넌스디자인, 게임디자인, 건축디자인, 공간디자인, 공공디자인, 굿디자인, 그린디자인, 네일디자인, 도시디자인, 도자디자인, 디자인경영, 디자인리서치, 디자인씽킹, 디자인엔지니어링, 디지털미디어디자인, 라이프스타일디자인, 로고디자인, 바디디자인, 북디자인, 전시디자인, 제품디자인, 주얼리디자인, 사운드디자인, 생태디자인, 서비스디자인, 소셜디자인, 시민디자인(디자이너), 시스템디자인, 신발디자인, 유아이(UI)디자인, 유엑스(UX)디자인, 운송기기디자인, 융합디자인, 인터렉션디자인, 인테리어디자인, 자동차디자인, 정보디자인, 조명디자인, 문화디자인, 타이포그라피디자인, 텍스타일디자인, 패션디자인, 팬시디자인, 포스터디자인, 헤어디자인...
위 조합어는 모두 46개이다. 위키피디아에는 37개의 디자인 하위분야가 정리돼 있다.(그림 1) 디자인 앞뒤로 단어를 붙여 만든 조합어를 전부 끌어다 모으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또 지금 없는 조합어를 만들어 쓴다 해도 특별히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으리라 본다.
조합어들의 범위는 사무용품부터 건축까지, 아날로그부터 디지털까지, 구체적 대상물품부터 추상적 개념까지를 오간다. 광범한 영역에 걸쳐있는 용어들 사이에서 디자인의 일관된 속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디자인이 거의 모든 것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디자인 개념의 몇 가지 특징을 말해준다. 그 첫째는 호환성과 확장성이다. 덧붙여 그동안 이런저런 분야에서 디자인을 탐냈고, 디자인과 결합하길 원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비슷하지만 더 우울하다. 불확정성이라 해야 할까.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디자인이 모든 인간 생활과 연결된다고도 하고, 기업 경영을 위한 필수 전략이라고도 하는데, 정작 서로 이야기하는 디자인이 같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왜일까?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야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본다. 특히 한국의 경우가 그렇다. 한국에서 디자인이란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이다. 이후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에서 디자인의 의미나 원리, 효용, 당위, 방향, 철학 따위의 문제를 다투거나 논의하는 문화는 자리잡지 못했다. 디자인을 주로 직관과 감각에 관계된 조형(造形)의 문제로, 또 돈에 관련된 문제로 여겨왔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디자인 관련 논쟁이나 논의도 대부분 그 경제적 가치와 효과를 따지는 정도이다. 미학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사회문화적 차원과 디자인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디자인의 원리와 효용, 당위, 방향, 철학 등의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이론(理論)'으로 접근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서의 이론은 그 두 가지 사전적 정의 중, 물론 "사물이나 현상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일반화한 체계"에 가까워야 하겠다. 무엇을', '어떻게', '왜'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정제된 말과 글로 이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디자인 이론이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느껴지며, 주변에서 찾아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구글에서 한글로 검색해보면, 용어의 정의나 디자인 방법론, 인지 원리에 관한 내용 정도가 나온다. 흔한 위키피디아 내용도 없다. 영문(design theory)으로 검색이 가능한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인지 원리나 디자인 방법론 등이 디자인 이론으로 자격이 없다거나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이론과 미술이론이 전문 영역으로 자리 잡은 것과 비교하면 디자인 이론이란 용어의 쓰임이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인은 어디에나 있는데, 왜 디자인 이론은 없을까. 우리 사회가 디자인과 관계된 여러 가치문제들의 존재와 필요성을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론적 논의가 결여된 디자인 제반 현상들은, 디자인에 대한 더 깊은 층위의 인식과 사고를 저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문제다.
이론의 부재는, 디자인 교육에서도 두드러진다.
내가 알기로 전국 대학 중 디자인 이론을 별도의 전공 과정으로 둔 곳은 단 하나다. 2013년에 개설된 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전공이 그 주인공이다. 이외에 대학원 연구실 단위로 디자인 이론을 다루는 곳도 몇 있다.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랩,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메타디자인연구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디자인 인문 연구소 등이다. 그러나 이곳들도 대부분 담당 주임교수가 한 명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디자인 매니지먼트', '서비스 디자인', '디자인 기획' 등의 전공을 통해 이론을 강조한 교과과정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또 많은 학교들이 박사과정 커리큘럼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전문성을 고도화하기 위해 이론을 부수적으로 다룬 셈으로, '디자인 이론' 그 자체를 중심에 두고 교육하는 것과 결이 다르다고 본다.
학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별 수업의 교육 방식과 내용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전국 대학에 별도의 이론 전공 과정이 없음은 물론이고, 커리큘럼에서 이론 교과목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아주 낮다. 일부 학교에는 이론이라 할 만한 과목이 전혀 없기도 하다. 적지 않은 디자인 전공생들이 디자인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영향관계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졸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디자인 이론이란 말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디자인 실기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디자인이 주로 시각이라는 '감각'에 관계된 실무행위이며 그 부산물이란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디자인에는 이론이 필요하다.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루어지며, 우리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학에서 사회와 문화, 역사 따위와 디자인의 관계를 고민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7년에 썼던 것을 고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