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호랑 Jul 31. 2019

디자인 = 산업디자인?

한국 디자인 법의 디자인 인식

정부기관이 주도하는 디자인 정책에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정책의 효과나 효율성이 의심스럽다면 모를까. 왜 만든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근본적 목적과 의도부터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공공디자인' 관련 정책이 특히 그렇다. 건설이나 토목 공사로 곧잘 연결되는 공공디자인 정책은, 대개 큰 비용이 들며 금세 다시 바꾸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 정교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대부분은 어설픈 것일까.



색칠하는 혁신도시


사례를 하나 들어 본다. 지난 2013년 10월 17일, 국토교통부는 혁신도시 색채디자인계획(참고)을 발표했다. "전국 9개 혁신도시에 지어지는 건축물에 지역 특성에 맞는 색채를 반영하여" 해당 도시를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그리스 산토리니 등의 외국 도시처럼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 계획이 '권고'의 효력을 가진다는 다행스러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색을 정해 도시를 치장하고 또 서로를 구분하겠다는 생각은 '혁신도시'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그림 1)


그림 1. 혁신도시 색채디자인계획 보도자료 (출처 : 국토교통부)



보도자료를 보면 "도시별로 선정된 색채의 적절한 조합", "최적의 도시색채 이미지를 구현", "외국 도시의 경우 ... 아름다운 색채경관을 형성하여 관광 명소로서 각광". "지역경제 활성화",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같은 표현이 눈에 띈다. 긍정적 의미를 담으려 애썼을 것이 분명한 이 문구들에서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무엇이 문제일까.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색의 통일을 아름다움으로 이해한 단편적 사고방식이다. 색의 편차를 줄이면 조화를 갖추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색채학에서 설명하는 '유사의 원리'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색을 가진 건물이 많다고 도시가 아름답게 보이란 법은 없다. 당연하게도,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근거가 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색을 가진 도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그림 2)


그림 2. 여러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캐나다 세인트 존스 뉴펀랜드의 풍경 (출처 : newfoundlandlabrador.com)


당위성의 문제도 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도시를 색으로 구분하거나 통일해야 한단 말인가? 각 도시에 ‘특정 색상 건물이 많다’는 인지 정보가 어떤 의미로 연결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건물 색칠하기를 통해 보여주려 하는 혁신도시별 특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색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 정부 기관이 나서 챙길 만큼 중요한 가치인지를 먼저 짚어봐야 한다.


국가의 지나친 인위적 개입과 통제라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다. 국가 기관이 나서 도시의 색을 정하고 권장하는 것을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까. 유럽의 일부 도시에서 엄격한 제도를 갖추고 건물 내외부의 형태나 색을 관리하는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도시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실효성의 문제도 두드러진다. 특정 연구집단이 8천7백만 원의 연구용역비를 받고 만든 결과물은 "지역 특성을 살린 차별화된 색채" 개발이라는 사업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듯한 용어로 꾸몄음에도 말(콘셉트)과 색, 지역과 색, 지역과 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지역별로 얼마나 색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공감하기 어렵다.(그림 3)


그림 3. 혁신도시별 콘셉트 및 색채계획 방향 (출처 : innocity.molit.go.kr)


더 근본적 이유로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보편적 '디자인 인식'이다. 디자인을 주로 '경제'나 '산업'의 측면에서, 대상의 외면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얕은 수단으로만 봐 왔기 때문이란 것이다. 디자인 관계자들이 쓴 숱한 칼럼, 기사, 책이 그 증거일 테다.



디자인 = 산업디자인?


이런 인식을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디자인 법이기도 하다.


디자인 관련 법은 두 가지로, 1977년 제정된 디자인·포장진흥법에서 이름이 바뀐 산업디자인진흥법(이하 산업디자인법)과 1961년 의장법으로 출발한 디자인보호법이 있다. (이에 더해, 지난 2016년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2019년 현재 디자인 관련 법은 모두 세 가지다.)


디자인보호법은 디자인 창작과 그 권리의 보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따라서 산업디자인법이 나머지 디자인 산업 전반을 포괄해야 할 테다. 그런데 이 법은 ‘산업디자인’을 모든 디자인 영역의 최상위 개념으로, 다시 말해 디자인 그 자체로 정의하고 있다.(그림 4)


그림 4. 산업디자인진흥법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제2조에 따르면, 산업디자인법은 제품디자인, 포장디자인, 환경디자인, 시각디자인을 모두 ‘산업디자인’의 하위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산업디자인은 Industrial Design의 번역어로, 수많은 디자인 하위 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다. 물론 비중이 큰 디자인 영역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비중이 큰 하위 영역인 것과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다르다.


오늘날 디자인이 거의 모든 것과 연결되고 있는 만큼, 그 많은 하위 영역을 분류하고 위계를 정하는 데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법의 디자인 분류와 정의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산업디자인법 제2조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법적 정의가 디자인 제반 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법의 이름이나 그 개념 자체를 '디자인진흥법'이나 '디자인산업진흥법'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새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림 5. 디자인보호법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디자인보호법도 유사하다.(그림 5) 제1조와 2조에 따르면, 이 법은 "산업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며, 디자인을 "물품(및 글자체)"에 한정해 정의하고 있다.


법적으로 디자인의 정의나 범주가 왜곡되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법이 낡았기 때문이다. 몇 차례 개정을 거쳤다 해도, 법에 담긴 디자인 인식은 법이 제정된 1960-70년대의 시각에 가깝다.


당시 군사정권은 디자인에 '포장'의 역할을 주문했다. 수출에 기여하는 그럴듯한 포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디자인 진흥기관에 방문해 ‘미술수출(美術輸出)’이란 휘호를 하사한 것도 이때다. 국가의 디자인 인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또다른 사례, 디자인 진흥기관의 기관명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 디자인진흥원의 이름은 한국디자인포장센터(1970~1991)였다. 이후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1991~1997),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1997~2001), 한국디자인진흥원(2001~) 순으로 바뀐다. 한국 현대사에서 디자인은 '포장'으로 출발해 '산업디자인'을 거쳐 비로소 21세기에 '디자인'이 된 셈이다.


'순수미술'과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응용미술'이나 '실용미술'이란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등장한 디자인이 그 무엇보다도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표면 장식을 위한 기교의 차원을 넘어, 수출 증대를 위한 도구의 역할을 넘어, '문화'의 범주에서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오늘날,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산업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의 가치를 오직 생산과 소비, 돈과 관련한 차원으로 한정해 보는 시각이 고착된다면, 광범한 인간의 일상 생활과 연결된 디자인의 역할과 가능성을 제대로 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3년에 썼던 것을 고쳐 썼다.

*상단 배경 사진 : 그리스 산토리니의 풍경 (출처 : www.discovergreece.com)



매거진의 이전글 디자인은 껍데기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