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교 선배를 만났다.
그는 10년 가까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패션 브랜드의 대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흥미로운 말을 들었다. 이 일에 뛰어들 당시 디자인이 껍데기라 생각했기에, 그동안 디자인 이전의 '본질'을 먼저 고민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본질이라 함은 해당 제품의 '기능'과 관련한 것들, 예컨대 재료나 물성 따위를 의미했던 것 같다. 사실 그 대화에서 '본질 이후의 디자인'이란 거의 브랜딩에 가까웠고, 또 어느 정도는 마케팅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은 껍데기"란 표현이 뇌리에 와 닿았다. 한 때 나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디자인 전공생의 좌절
한창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학부 저학년 시절이었다. 일부 전공 수업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강의나 과제의 내용이 명쾌하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느꼈다. 특히 의도와 방향, 원리 등에 대한 이야기 대신 현학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연설을 듣고 있을 때, 평가 기준조차 알기 어려운 과제 점수와 학기 성적을 마주할 때 당혹감이 컸다.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디자인을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이런 류의 수업에서는 답을 얻기 어려워 보였다.
얇고 가벼웠다. 그리고 표피적이었다. 내용과 깊이에 만족하기 어려웠기에 점차 수업이, 그리고 디자인이 재미없다고 느꼈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졸업 후 디자인 말고 다른 일을 하겠다며 푸념하는 동료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나를 포함한 그 대부분은 현재 디자인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굳어진 것은 교양 수업과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대부분은 명확한 내용을 예리하게 다뤘고, 내용에도 깊이가 있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모두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 기대 난이도나 관심도와 실제 사이의 괴리에서 생긴 문제였고, 아주 가끔씩 선생님의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경우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디자인 전공 수업의 문제는 수업 간에, 정확히 말해 교수자 간에 편차가 크다는 데 있었다. 몇몇 교수(강사)의 강의는 전혀 달랐다. 적어도 수업 안에서 명확한 나름의 논리와 방향성이 있었다. 이런 과목으로 인해 디자인을 한다는 것의 묘미를 알게 되었고, 디자인의 의미와 범주, 역할 따위를 새롭고 진중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생각해보건대, 만족스럽지 않았던 일부 수업의 담당 교수자는 아마도, 가르치기 이전에 디자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마주해야 할 문제들, 예컨대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지,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 따위를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일지 모른다. 아니라면 그저 능력이 부족했거나, 수업 외에 다른 일이 더 바빴을지도 모를 일이다.
디자인을 껍데기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교수자 선정이 학교의 몫이라는 점에서, '디자인은 껍데기인가'와 같은 전공생의 자조적 의문을 유발한 것은 (적어도 내가 경험한) 대학 교육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책임을 오롯이 대학에만 떠넘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한동안 디자인을 대하는 사회 전체의 인식과 태도가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디자인은 '포장'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을 위시한 관료들은 디자인을 오로지 수출 증대를 위한 도구로 인식했을 뿐이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전 글, <디자인 = 산업디자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한국의 대표적 디자인 진흥기관인 한국디자인진흥원이 1970년 5월 한국수출품포장센터와 한국포장기술협회, 한국수출디자인센터 등의 3개 기관을 통합해 한국디자인포장센터로 출발했다는 사실이 과거 한국 정부의 시각을 증명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나의 석사학위 논문 <1960-70년대 한국 디자인 개념의 형성과 전개>를 참고하셔도 좋겠다)
국가 권력이 디자인을 포장으로 여기며 "촌놈 냄새를 빼"는 역할을 강제로 부여한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 디자인은 외면 개선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의 수단으로, 계획적 진부화 전략을 통한 소비 활성화의 방편으로, 다시 말해 껍데기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비단 한국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디자인이 기능을 초월해 대상의 본질, 환경, 인간(사용자)의 행동과 삶 따위와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문화의 차원에서 곧잘 다뤄지는 오늘날에도, "산업발전에 이바지"나 "상품가치 확장"처럼 '껍데기' 유사 역할을 강조하는 수식어는 여전히 디자인을 따라다니고 있다.
디자인은 아직 껍데기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디자인은 껍데기인가"란 질문을 마주해 본다. 학부 저학년 시절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지금의 나는 망설임 없이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것이다. 현대 디자인의 수많은 역사를 통해, 동시대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디자인 활동을 통해 디자인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해 왔다는 사실을 예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확신하긴 이르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연유에서건 디자인을 껍데기로 여기는 생각이 일반화된다면 언제건 디자인은 껍데기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근 몇십 년 간 한국이 그랬듯이 말이다.
디자인은 껍데기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더 깊고 풍부한 디자인의 역할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추구하는 각 디자이너, 교육자, 행정가, 기타 관계자들의 작은 실천들이 쌓였을 때 선명하게 구해지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