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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Nov 03. 2019

[지극히 사적인 전시회 답사기](16)

(16)  우리 몸이 조각이라면 - 마크  퀸의 장애 조각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사가 있다. 그 대사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잠깐 스포일러를 해야겠다, 주인공 정해인과 그의 친구들은 학창시절 장난을 치다가 한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들은 이 사건 때문에 이십대가 되어서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해인은 동갑내기 여주인공과 첫사랑에 빠지고 설레는 미래를 꿈꾸다가도 문득 문득 찾아오는 죄책감과 일탈을 종용하는 그 때 그 친구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대 배경. 하지만 생뚱맞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후반부에서 정해인을 괴롭히는 친구의 한마디. “너만 용서받은 기분이야” 그렇다. 주인공 정해인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인정하는 키 크고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하도 영화 전반에 걸쳐 정해인은 잘 생겼다는 주변 캐릭터들의 찬사가 반복되었기 때문인지 ‘너만 잘 생겨서 용서 받은 기분이야’로 받아들여졌다.       


 역시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말, 부인할 수 없다. 특히나 요즘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대변되는 비디오시대가 아닌가. 다른 피디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필자는 편집을 하다가 우연히 내가 찍힌 순간을 보면 천천히 돌려본다. 내가 이렇게 자세가 구부정했던가, 내가 이렇게 살이 쪘던가. 출연자들과 필자가 한 앵글에 있는 화면을 보면 수술을 아니더라고 시술 정도는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즈음,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마주한 조각상 두 점은 또 다른 차원에서 고민을 깊게 만들었다. 우리말 제목은 ‘키스’. 클림트의 관능적인 키스 장면과는 다르다.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된 남녀가 끌어안고 키스하는 모습은 뜨겁기 보다는 평범해 보이고 약간은 서글픈 느낌이었다. 매끈한 재질을 자세히 보려고 그 커플 가까이 갔다가 깜짝 놀랐다. 조각상 전체가 흰색이라 멀리서 볼 때는 미처 몰랐는데, 다른 각도에서 보니 남녀 커플에게 팔의 일부가 없었다. 장애를 갖은 몸이었다.      

마크 퀸의 ‘키스(not kiss), 2001년도 작’

 그 옆에 있는 작가 ‘마크 퀸’이 만든 또 다른 작품 ‘피터 헐’은 더 당황스럽다. 매끈한 얼굴과 건장한 근육의 상반신, 남성성을 적나라하게 묘사된 몸에 하반신이 없다. 두 팔도 없다. 그냥 생략이 아니라 장애로 인해 소멸된 팔이다. 건장한 남성의 몸 일부와 장애가 있는 육체 일부분의 결합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낯설고 당혹스럽다. 마치 길에서 갑자기 장애인을 마주쳤을 때,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되 그러한 시선 처리조차 그가 알아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들킨 느낌이다.      

마크 퀸의 ‘피터 헐’, 2002년도 작


 부자연스러웠던 감정을 숨기는 것은 차라리 사사로운 일이다. 필자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장애라는 건강불평등이 소득불평등과도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후천적 장애를 가질 확률은 같을까. 소득의 차이에 따라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는 정도와 의료 서비스로 접근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나는데, 이는 곧 사고 및 장애 가능성과 연결되지 않을까. 때문에 요즘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신체 일부를 잃게 된 사고 기사를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속상한 마음과 내 자식은 위험한 환경에서 최대한 멀리 있게 하겠다는 이기심이 동시에 발동한다.      


 불편한 마음은 차라리 외면하는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나보다. 어느 새 그들은 ‘안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한 프로그램에서 장애인들의 예술 활동을 담았다. 시청률은 평상시 편성된 프로그램의 반 토막이 났다. 마이너한 사람들, 우울한 분위기, 수년 간 수치로 확인된 낮은 시청률.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불편한 몸의 사람들’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피디는 몇이나 될까.   

   

 필자는 또 한 번 불편함을 견뎌내지 못했다. 요즘 대세인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사진으로 남기는 바디프로필’에 대해 조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마크 퀸’의 조각상을 본 후, 육체에 대한 접근이 한 없이 가벼웠음을 자책했고, 작품 감상 후의 고민들을 담아보려다 그 무게를 견대지 못해 아이템 자체를 포기해 버렸으니까.        


 프로그램으로 담지 못했고, 그래서 내레이션으로도 담아내지 못한 말이 있다. 

 ‘마크 퀸’의 작품을 소개한 큐레이터의 말인데, 영화 속 대사만큼이나 잊혀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완벽한 육체를 빚었다고 감탄하는 ‘밀로의 비너스’도 팔이 없다는 걸 아십니까.” 

    (끝)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130~120년경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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