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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an 01. 2019

[나의 지극히 사적인 전시회 답사기] ⑤

강박과 리믹싱이 만든 비디오 아트, <더 클락(the clock)>

 한 때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 시나리오 작법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비록 데뷔는 못했지만 이년 육 개월 동안 배우고 훈련한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드라마 속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의 ‘그 순간’은 1초가 아니라 배경 음악이 클라이막스까지 흐를 정도로 긴 시간이 되고, 드라마 속 요리하는 장면은 아무리 어려운 요리라도 1분도 안 되어 뚝딱 만들어 질 정도로 생략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기법인데도, 초짜 시나리오 작가들은 대본의 시간을 상대적으로 구성하는데 서툴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나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의 상대성’ 법칙이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시퀀스의 시간 할애 분량을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고 나만의 작품을 보는 관람 포인트가 되었다. 때로는 ‘에이, 이 작가는 하수네. 어? 이 감독은 고수네?’하며 남의 귀한 작품을 섣부르게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시건방지게 ‘시간의 상대성’을 운운하던 내가 정반대의 ‘절대적 시간’을 담은 영화를 보고 놀란 것은 지난 가을의 일이다. 영화라고 했지만, 비디오 아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리믹싱 비디오의 하위 장르 ‘슈퍼컷’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할수록 정체도 모호하고, 의미를 생각해봐도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필름이다. 이 비디오 아트의 제목은 ‘더 클락(the clock)'이다.      

 지난 가을,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둘러 보다가 다리가 아파서 잠시 쉴 생각으로 비디오 상영실에 들어갔다. 스크린에는 몽타주 기법으로 제작한 필름 한편이 상영 중이었다. ‘더 클락’은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은 흑백영화부터 ‘펄프 픽션’ 등 최신 영화의 시간과 관련된 컷들을 자르고 모아서 12,000여개의 컷으로 리믹스하여 재구성 한 작품이다. 내가 상영실에 들어 갔을 때는 약 오후 1시 45분이었는데, 그 순간 상영되던 필름 내용은 이랬다. 남자 주인공이 의문의 전화를 받는데, 2시에 기차역에서 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제보이다. 주인공이 손목 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이 1시 45분이다. 남은 15분 동안 주인공은 시계를 보며 기차역을 향해 달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2시 정각에 해당 장소에 도착하면, 또 다시 3시에 다른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 받는 내용이다. 기차역 시계, 벽시계, 손목 시계, 버스 안 라디오 시계 등의 컷을 다 모으고, 대사도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편집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15분의 시간 경과는 실제의 15분과 똑같이 흐르고, 영화 속에서 2시를 가리킬 때 현실의 시각도 2시 이고, 영화 속에서 2시 5분 일 때 현실의 시각도 2시 5분으로 영화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실시간으로 평행하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데, 관객인 ‘나’ 역시도 필름을 보는 내내 자꾸 시간에 쫓기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흥미로운 스토리 진행이었지만, 영어 자막도 없이 영어 대사를 듣고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영화를 처음부터 보고 싶기도 했고, 상영 굉장히 길 것 같은데 영화를 보다가는 다른 미술품 관람을 할 수 없을까봐  입구에 있는 스태프에게 영화의 엔딩이 어떻게 끝나냐고 물어봤다. 스태프가 말하길 “저도 몰라요. 영화가 24시간 짜리인데, 우리는 10시에 오픈해서 17시에 관람을 종료하거든요” 자신도 영화의 일부만 겨우 봤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더욱 이 작품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이 비디오 아트를 만든 사람은 크리스천 마클레이와 6명의 어시스턴트인데, 첫 몇 달은 영화들을 컷 별로 자르고 정리를 했고, 그 후 3년간은 비디오 편집을 했다고 한다. 이 후 오디오 작업 시간까지 합하면 더 긴 세월인데, 이를 두고 강박이 있는 아티스트라 해야 할지, 집념이 있는 예술가라고 해야 할지, 그저 그의 끈기가 부러울 뿐이다. 저작권 측면에도 ‘더 클락’은 논쟁거리가 있는 작품인데, 크리스천 마클레이는 수많은 영화를 리믹싱 하면서도 원작에 대한 저작권은 단 한편도 양도 받지 않을 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천 달러에 작품을 팔았으니, 아직은 별 일 없지만 향후 저작권 관련 이슈가 될만한 사례이다. 더구나 ‘시간’이란 경험과 개인에 따라 상대적이면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절대적 가치이기에 내용적으로도 할 얘기가 많은 작품 아닌가.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관객은 앞으로 많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오직 다섯 개의 복사본만 존재하는 조건으로 세계 유명 미술관과 콜렉터에게 판매 되었고, 동시에 두 개 이상의 미술관에서 상영될 수 없다는 룰도 있다. 운좋게 미술관에서 ‘더 클락’ 작품을 만난다 한들, 미술관 개장시간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24시간의 필름을 볼 수 있는 관객이 있을까? 나는 운 좋게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이야기꺼리’가 많은 ‘더 클락’을 보았지만, 온전하게 한 편을 보지 못했기에 아쉽다. 두 번 다시 ‘더 클락’을 보기 힘들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궁금하고 애착이 가는 걸까? 혹시 마주친다 한들 나의 24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 볼 수 있는 작품이기에 ‘더 클락’은 더 강렬하게 나에게 기억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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