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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an 15. 2019

<두 번째 도서관>1. 시작

 여자 나이, 마흔은 풋풋한 스무 살이 될 때와 열정의 삼십 세가 되는 것과는 또 다른 인생의 계단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아직도 어설픈 것들이 많고, 어렴풋이 알게 되니 무엇인가를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더 고민이 되고 혼란스럽기까지 한데 마흔이라니.... 마흔은 불혹(不惑)이라는 데, 아직도 남의 말에 흔들이는 팔랑귀에 갈대처럼 갈피를 못 잡고 하루하루 흔들리며 살아가는 나....    


 드라마 <Sky 캐슬>에서 진진희(오나라 役)가 대장을 섬기 듯 따르던 한서진(염정아 役)에게 반항하게 된 계기는 한서진의 ‘줏대없다’ 는 말 때문이었다. ‘줏대 없다’는 말에 화를 내는 진희에게 너무 공감이 갔다. 마흔을 막 넘은 나 역시, 나의 커리어와 취향과 심지어 육아에서도 방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도서관>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을 때, 취지는 좋지만 개인적인 걱정이 하나 있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안정된 직업과 전문성, 큰 문제없는 가정과 건강. 대박은 아니어도 새로운 프로그램 런칭하며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있는 ‘나’. 이런 나도 불안하다고 얘기하면 같이 참여하는 멤버들은 공감해줄까? 멤버들이 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인데, 프로젝트를 하는 것보다는 가볍게 만나서 수다 떠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올해는 하던 일 조차도 줄이고, ‘미니멀리즘’생활을 하고 싶은데, 또 프로젝트 하나 추가한 것 아닐까? 그냥 나는 모임에서 빠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참여한 첫 모임. 

멤버들은 나와 동갑내기들이고 고등학교, 재수학원, 대학교 중 한 시기를 함께 한 친구들이지만, 프로젝트에 진지하게 임해야 겠다는 생각에 ‘누구야’하지 않고 ‘누구님’으로 불렀다. 처음엔 오글거리긴 했지만, 모두들 곧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간단한 다과를 먹으며, 모임 장소의 인테리어 이야기로 아이스 브레이킹(ice-breaking)을 했다. 모임을 디테일하게 준비한 재은님의 모습에서 친구가 아닌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나의 인생 10가지 사건>을 브리핑하며,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는 것으로 모임은 시작되었는데, 십년 이상 알고 지낸 친구들에게서 내가 몰랐던 내면을 알게 되었다. 학창시절 친구와의 행동, 이벤트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감정과 고민들을 이렇게 몇 시간씩 친구의 인생에 초점을 맞춰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자신의 특징도 더 알게 되었다. 멤버들이 인생의 10대 사건 당시의 감정과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행위 위주로 나의 지난 날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관계지향적이 아니라 목적지향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멤버들은 서로의 인생 브리핑을 들으며, 서로가 어떤 사람인 것 같다고 키워드를 골라 주었는데, 나에게 준 키워드는 ‘도전, 성실, 기준이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 불안해 진 것도 있다. 다들 하고 싶은 일과 방향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고, 구체적인 실천만 하면 되는데 나는 아직 커리어패스(Carees Path)조차 짜지 못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아 방송 제작과 연출 일을 하면서 괴로운 적은 없었다. 휴먼다큐부터 문화, 시사, 드라마, 예능까지 별별 장르를 다 하면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새롭고 흥미로웠다. 이것 저것 다 할 줄 안다는 것에 내심 뿌듯하기도 했고, 처음 하는 일도 그렇게 겁나지 않았다. ‘이PD는 항상 새로운 프로그램을 한다’는 것이 좋은 평가라고 생각하고 16년을 일했는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많은 프로그램을 런칭하고도 대중의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특히 작년에 후배와 같이 새로운 것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해서 만든 프로젝트 했는데, 방송 후 후배의 ‘흉내 내기’에 그친 것 같다는 말은 더욱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어디부터 잘못 되었을까? 이젠 재미로만 일 할 때는 아닌가 보다. 좋아하는 일 보다는 잘하는 일을 찾아야 할지 않을까? 내 인생도, 내 커리어도 정리하고 정돈하고 구조조정 해야 될 때 아닐까? 하지만 나는 다 재밌는데 뭘 솎아 내고, 뭘 지워야 하나? 내가 너무 욕심이 많나? 줏대가 없나? 그래서 하는 일도 그렇고, 취미 생활도 흉내만 내다가 끝나는 것 아닐까?     

 아직은 <두 번째 도서관> 프로젝트의 과제들이 나에게는 괴롭다. ‘나의 브랜드’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적당히 안주하며 살 수 있다. 그런데도 몇 시간동안 답도 나오지 않을 나 자신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마냥 신나지만은 않다. 앞서 얘기 했듯 ‘행위’에 방점을 두는 나에게 답도 없을 과정을 진행한 다는 것은 땡볕과 한파 속에서 야외 촬영을 하는 것보다 더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꾸역꾸역 <두 번째 도서관> 프로젝트에 출석하고, 과제를 할까 한다. 적어도 내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생길 테니까. 또 나와 같은 나이의 여성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마흔이 된 나의 불안감의 근원도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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