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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Mar 03. 2021

한국어로 책 읽는 날

어제,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작은 소포를 받았다. 택배는 물론이고 엽서 하나를 받을 수 없는 시간이 1년 가까이 계속 이어졌던 터라, 한국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 우체국으로 향했으나 보내지 못했다는 말을 종종 전했다. 이 와중에 정말 바쁜 친구가 분명 몇 번이나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보낼 수 있는지 확인했을 그 고마운 배려 또한 담겨있어서 그런지 그녀가 보낸 작은 택배 상자는 묵직한 온기가 가득했다.


나에겐 매년 미안할 정도로 비싼 택배비를 감당하면서도 늘 한국어로 된 책 한 권쯤은 종합 선물상자 꾸러미 속에 넣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고마운 마음 씀씀이 덕에 한국어로 된 책을 아껴서 읽다 보면 한 해가 훌쩍 지나가곤 한다. 


2021년의 책들


2021년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올해는 읽어야 할 책을 16권 정도 적어보았다. 올해의 테마는 '말과 글의 결'. 회복탄력성과 미술과 심리, 협상에 관한 책 등으로 구성된 8권의 영어책과 내가 좋아하는 번역가, 소설가 분들의 책, 돈에 대한 책, 작사가 김이나 님의 에세이등으로 구성된 8권의 한국어 책으로 목록을 구성했다. 또, 개인적으로 쓰고 싶은 세련된 문체나 표현을 쓰는 신문과 잡지를 온라인 구독으로 1년 치를 구독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월급날이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 몇 권을 사서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이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책 보는 낙으로 10대와 20대를 보냈었다. 매년 수십 권의 책을 읽었고, 서울 집에는 책이 늘 쌓여있었는데 이제 그 책들 중 많은 책들은 중고서점으로 팔려나갔지만, 여행 중에 산 도록이나 잡지, 그리고 나에겐 떼어놓은 피붙이 같은 책 수백권은 여전히 어머니 집에 수북이 쌓여있다. 


타지에서는 일과 공부에 관련된 책을 보기에도 벅찼고 늘 캐리어 두 개에 이사가 가능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한국어 책 몇 권은 무겁지만 나에게 허락하는 유일한 사치가 되었다. 그래도 한국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몇 번 읽어도 좋은 책들로 4권 정도 골라서 한국의 어머니 집에 가져오고 다시 갖다 두고를 반복하는데 마음 같아선 어머니 집에 쌓인 책들을 호주로 텔레포트하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을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 줌파 라히리의 인터뷰-


영어권 국가에 살면, 당연히 영어가 늘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지만 내 경험상 '더 치열하게 공부하게 되는 이유'가 늘어가는 것 같다. 몇 년 째, 나는 제2언어( 통역에서 말하는 B언어- 모국어는 아니지만 능동적으로 의사전달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언어)로 나는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하며 '사랑한다'는 말 또한 모국어가 아닌 언어들을 사용한다.


또, 속상한 일에는 무조건 참지 말고 필요할 때는, 분노를 이성적으로 다스려 의견을 논리적이며 합리적으로 피력해야 타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다. 모국어가 아니기에 생각을 하고,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장점 때문인지 나에게 영어나 프랑스어는 '이성의 언어'이며, 타고난 '감성'이 예민하고 뾰족한 나에게는 이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언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화가 날 때는 이 이성의 언어들을 가장 감정적인 상태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성의 언어, 감성의 언어


예전에 피아노를 배울 때, 피아노 선생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하루 연습을 안 하면 네가 알고, 삼일 연습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알고, 일주일 연습을 안 하면 세상이 안다." 

이 말이 20년쯤 뒤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때 가장 명심하는 말이 될 줄은 아마 그 선생님은 모르셨을 것 같다. 음악으로 혹은 언어능력만으로 밥을 벌어먹는 처지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이 말을 매일 같이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매일 언어의 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읽고 쓰고 말하고 그리고 듣는 연습을 한다. 


물론, 모국어인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타지에 살면 그 나라의 언어만 쓸 것 같지만, 내가 예전에 학생들에게 영어와 국어 수업 때 늘 강조하듯 언어의 칼날 중 모국어의 칼날은 가장 무뎌지지 않게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장 정확하게 외국어를 쓰기 위해서는 모국어의 정확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함을 타지에서 와서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모국어의 칼날이 날카로워질수록, 국어사전을 폈을 때 쏟아지는 모르는 단어와 표현에 더욱 겸손해진다.



한국어 책 보는 날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고랑이 덕분에,  넷***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때는 드라마의 내용과 영어자막의 흐름을 첫 몇 편을 나 혼자 먼저 보고 어느 정도 파악 한 뒤에 그와 함께 보며 필요한 경우에는 자막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덧붙이곤 한다. 잊고 지내던 한국 역사의 일부분을 설명을 해야 할 때도, 문화적인 요소를 적절한 예시를 들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생긴 작은 습관이 바로 '한국어 책 보는 날'이다.  


이 날은 한국어로 된 종이책이나 아쉬운 데로 종이책으로 사보고 싶을 만큼 좋은 전차책을 대중교통 이용시간 동안 본다. 또, 책갈피로 저장해두었던, 한국에서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공유해 준, 곱씹어볼 만한 잡지나 칼럼 등을 읽어보기도 한다. 마음에 많이 와 닿았던 구절은 다이어리에 한 줄이라도 필사를 해보며 그 날을 마무리해 본다. 재미있게도, 한국어는 나에게 모국어이자, '감성'의 언어인 것인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랑 맘껏 수다를 풀고 가벼워지듯, 이 하루를 잘 보내고 나면 가슴속 응어리가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혹은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듯 한 대 쾅 맞은 느낌이 들어 얼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하루가 끝나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더 타지의 언어들에 가까워져야 한다. 감성이 날카로워진 만큼 이성 또한 날을 세워야 한다. 내가 살고 숨 쉬는 곳의 공기 같은 이곳의 언어를 크게 심호흡을 고르듯, 더 빽빽하고 양질의 글과 말을 깊게 집어넣고 빼는 연습을 해본다. 이번 해에도, 왠지 한국으로 향하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을 것 같지만, '한국어로 책 읽는 날' 만큼은 꾸준히 지키며 한 해를 보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다. 한국어는 어렵지만, 모국어로 선택받아서 참 감사한 언어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서점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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