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겨울, 환갑을 맞이하신 어머니를 뒤늦게라도 축하해드리기 위해 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마자 인천공항에 도착합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유학생에게는 한국에 가는 비용도 부담이 되었지만,그래도 어머니 환갑이고 생신을 제때 챙겨드리지 못한 해가 많아서 고민을 하다가 어머니와 부산 여행을 계획합니다.
남들은 부모님 생신 때 비싼 명품백도 해외여행도 척척 보내드리는데... 부족한 딸내미라 그래도 앞으로 더 많이 해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기로 합니다.
KTX와 호텔 예매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실만한 맛집도 찾고, 바다 풍경이 좋은 장소들과 평소보다 노곤 노곤하게 여유를 부릴만한 장소도, 그리고 소소하지만 딸과 함께 하는 여행이니 오래 기억하실 무언가를 만들어드리고 싶어서 학기 내내 짬짬이 준비를 해봅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이렇게 여행하는 게 처음이어서 설레기도 하면서, 최대한 불편함 없이 건강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좀 더 신경을 써봅니다.
엄마와의 부산여행
어머니와 부산으로 출발하는 날. 엄마는 새벽 일찍 일어나 소풍 가는 아이의 표정으로 짐을 한번 더 챙기셨고, 저는 먼저 동네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러 나가니 서울역 기차역에서 오전 10시 30분에 만나자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어머니를 위한 작은 선물과, 함께 여행을 기념할만한 와인을 두꺼운 니트로 꽁꽁 싸서 캐리어를 잠그니 비로소 여행의 기분을 한껏 느낍니다.
그렇게 치과 진료가 끝나자마자, 서울역으로 갔는데 어머니가 계속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미안하다, 먼저 가있어. 이따 전화할게'라는 메시지만 남긴 채, 약속한 시간 1분 전까지 어머니는 전화통화도 안 되는 상황에 저는 혼자 부산으로 먼저 향합니다.
쨍쨍하고 좋을 줄 알았던 부산 날씨는, 저의 기분처럼 먹구름이 가득 낀 채 비바람이 몰아쳤고,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에는 도착해보니 2인분부터만 판매를 한다고 해서 식사도 못한 채, 비 맞은 생쥐꼴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늦게 걸려온 엄마의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떠있었습니다.
연말이라 직원들의 휴무를 적어두는 사무실 달력이 중간에 바뀌었는데 엄마의 휴가일이 아마 다른 날로 옮겨 적혀 있었나 봐요. 이 사실을 몰랐던 엄마와 이미 다른 직원분이 이 날에 휴가를 내고는 휴가지로 가셨고, 그나마 여행 출발 전인 엄마는 급하게 출근을 하셔야 했다고 하더라고요.
'겨우 엄마의 휴무 이틀을 사용하는 엄마와의 여행이었는데...' 표현할 수 없는 속상함과 서운함에 화도 났지만, 누구보다 어머니가 가장 속상하실 터라 '다음에 우리 엄마 더 좋은 곳으로, 더 여유 있게 모시 가라고 그러나 봐요.' 하며 약속합니다.
그 와중에도 자식 밥걱정하는 어머니를 위해, 부산역 근처에 가끔 가는 만두집에서 만두 사진을 최대한 예쁘게 찍어서 어머니께 보내드렸으나 입맛이 없어서 남은 만두를 포장을 해서 숙소에 도착합니다.
어머니 생신 기념으로 잡은 뷰가 정말 좋은 호텔에서는 감사하게도 제가 남긴 요청사항 덕분인지 한층 더 넓고 좋은 뷰로 업그레이드를 해주셨는데, 그 넓고 넓은 방에 혼자 덩그러니 만두 봉지와 캐리어 하나를 들고 들어와서 보이는 뷰는 너무 외롭고 아름다워 무언가 마음이 말캉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혼자이지만 캐리어에서 와인을 꺼내,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바다의 풍경과 호텔에서 준비해주신 웰커밍 기프트와 카드를 함께 엄마에게 사진으로 나마 전송해 봅니다.
너무 푹신하고 아늑한 방과 호텔 직원들의 고마운 배려에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샤워를 한 뒤 와인을 한 잔을 하며 몇 년 간 팽팽하게 끊어질 듯 지냈던 일상들을 잠시 놓아두기로 합니다.
다시, 부산으로
두 해가 지나고, 다시 한국에 오자마자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합니다. 몇 년 사이에 엄마의 손은 더 작아졌고, 주름도 흰머리도 더 많아진 게 눈에 보여서 마음이 짠해진 감정은 잠 뒤편에 두고, 핸드폰을 켜서 머리에 꽃도 달고 강아지 귀도 달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엄마와 잔뜩 사진을 찍어봅니다.
전날 오후까지 일하셨던 엄마는 조금 피곤하셨는지 초콜릿 하나를 드시더니 코를 살짝 골며 주무셨고, 저는 인터넷으로 체크해놓았던 일정과 장소들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해 보며 부산으로 향합니다.
아기자기하고 색이 예쁜 풍경을 좋아하시는 엄마를 위해, 평소보다 더 젊은 사람들이 가는 공간들을 소개하며, 돌아다녀 봅니다.
"엄마, 이런데는 사진 찍어야 돼요. 거기 서보세요. 우리 엄마 예쁘네! "
엄마는 나이 들어서 젊은 사람들 틈에 왜 끼냐고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시더니, 점점 즐거워하시며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십니다.
그렇게 알록달록한 색이 가득한 동네에서 산책을 하고, 예쁜 엽서를 한 장씩 사서 나눠갖고는 모노레일을 타고 부산 전경을 보기도 하고, 바닷가를 걸으며 해가 멀찌감치 지는 순간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갓 구운 어묵을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떨기도, 다리가 9개가 든 오징어에 웃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동백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보기도 합니다.
진한 전복죽과, 뜨끈한 돼지국밥 그리고 시원한 복국으로 해장을 하며 아침부터 땀을 쫙 빼기도 하고, 부산의 예쁜 풍경이 그려진 컵을 엄마와 커피를 내려 함께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혹은 해운대 근처 크리스마스트리에서 소원을 빌며 연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단 음식을 잘 못 드시는 엄마이지만, 경치가 빼어난 호텔 창가에서 예쁜 티세트를 즐기는 시간도 선사해봅니다. 사소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해드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많이 엄마와 나누고자 한 여행이기에, 조금은 바쁘고 빼곡하게 시간을 채워봅니다.
부산에서 엄마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많았지만, 종종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들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점점 연세가 드시면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신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미어지는 듯해, 매년 한국에 갈 때마다 몰래 많이 울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다지 살갑거나 애교가 많은 딸이 아니어서, 그 마음마저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삭혔다가 마음에도 없는 잔소리를 엄마에게 하고 맙니다.
한국에 가서 엄마와 갓 구워진 호떡을 하나씩 들고 시장에서 옷 구경도 하고, 티브이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보며 나물도 다듬고 만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산에서 캐온 쑥에 콩가루를 묻혀서 끓인 쑥국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음대로 쉽게 발걸음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올해도 그 아쉬움을 달래며 엄마와 조금 더 전화통화를 해봅니다.
"엄마 우리 작년에 부산 갔던 것, 기억나세요? "
작년 부산 여행의 기억이 단 하루라도 엄마에게 조금 더 오래, 행복한 시간으로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