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저와 고랑이는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들고 1시간 정도 차로 운전해서 초대받은 한 커플의 집을 방문했어요. 바로, 고랑이가 직장에서 20년 넘게 알고 지낸 클라이언트이자 이젠 친구인 G와 그의 부인 F의 작은 휴가용 집 (Vacation house)이었어요.
40년 차 커플, G와 F
G와 F는 벨기에 사람이며, Flemish (한국어로는 '플래망어'라고 하네요.'네덜란드어'와 매우 유사한 언어로, 벨기에 인구의 55% 정도가 사용한다고 합니다.)를 구사하는 지역의 출신으로 둘은 결혼 후, G의 시부모님과 함께 호주로 이민을 와서 약 40년간 결혼생활 동안, 4명의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내고 부부 각자의 비즈니스 또한 탄탄하게 쌓아 올린 멋진 부부입니다.
저는 G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다양한 중고 카메라를 파는 박람회에서 고랑이의 수동 카메라를 골라주기도 하고 저희 둘의 사진을 찍어 인화를 한 사진과 벨기에산 초콜릿을 보내주기도 하는 고마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서 처음 이 부부를 만나는 자리가 기대되었어요.
조용한 동네여서 나무 문을 조심스레 똑똑 두드려 집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프랑스와 벨기에 사람들이 무척 사랑하는 '땅땅 (TinTin; 영어로는 틴틴)' 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이하는 G와, 분주하게 치즈 플래터와 프로세코를 세팅하던 F는 호주 원주민 출신 화가의 시원한 그림과 높은 찬장, 그리고 펼쳐지는 우거진 녹색 나무들과 새소리가 가득 들리는 창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초록색 여유를 보이며 저와 고랑이를 맞이합니다.
코로나 이후, 자주 보지 못했던 G와 고랑이는 서로 안부를 물으며 근황을 이야기하고, G와 F가 2년 동안 전 세계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호주에 오면 쉴 공간 겸 별장을 찾다가, 우연히 이 집을 발견하게 되어 사게 된 이야기, 제가 유난히 맘에 들어하는 그림을 구하게 된 사연, 그리고 G와 F의 네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과 보내는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점점 치즈 플래터는 비어 가갑니다.
저는 잔을 채우고 비우다가 F가 가장 즐겨먹는 칵테일이라는 'Harvey Wallbanger' (오렌지주스, 보드카를 섞어 만든 스크루 드라이버에, 갈리아노라는 알코올을 추가해서 만든 칵테일입니다)을 살짝 독하게 말아줍니다. 아무래도 한국인들만큼이나 벨기에인들도 술부심이 있나 보더라고요.
자리를 옮겨, 근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프란젤리코를 곁들인 아포가토를 맛보며, 계속 술자리가 이어집니다. 한 배에서 태어났지만 너무나도 다른 아이들 훈육하고 진로를 찾아주는 과정부터, 둘째가 지구 반대편에 있던 외국인 대학생과 사랑에 빠졌고, 그를 사위로 맞이하기까지 학비와 지원을 해준 이야기, 벨기에에서 이미 본인 커리어와 일상을 탄탄하게 다지고 있고 F가 임신을 한 채, 타지로 건너와서 가난과 커리어의 부재로 무척 고생하던 이야기 등을 들어봅니다.
또,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두 집 남자들의 탐험기 또한 즐거웠어요. 고랑이가 정원에서 며칠전 아기 사마귀와 작은 도마뱀을 발견해서 찍은 사진을 서로 보여주었고, 저와 사귀기 전 인도 출장 중이었던 고랑이가 코브라와 셀카를 찍어서 저에게 보내서 '이 남자 뭐지..' 하며 당황했던 에피소드, G는 벨기에에서 살 때, 애완 뱀이 집 세탁기 안쪽으로 들어가 며칠 동안 찾은 사건, 동물을 안 좋아하는 예비 장인어른 차에서 G가 뱀을 잃어버렸다가 혼쭐날뻔한 사건 등. 그리고 이야기는 늘 그렇듯 전혀 다른 주제로 흘러가 한국음식, 2차 세계대전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어느덧 새벽 2시가 다되어서야 깨끗하게 마련된 손님방에 몸을 누여봅니다.
늘 제 다리 맡에서 잠드는 맥주와 칭얼거리는 소주 대신(저희집 고양이들 이예요) 제법 시끄럽지만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진 새소리 알람에 잠을 깬 뒤, 창밖의 푸르른 녹음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F가 아침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최근에 허리를 다쳐 힘들어하는 F를 위해 자칫 까다롭게 느낄 수 있는 요구에도 웃으며 도와주는 G와 그들이 음악처럼 잔잔하게 플레미쉬로 대화를 하며 아침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최근에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중 잠재적인 위험을 모른 채, 안주하기 쉬운 장기간 연인관계 혹은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화가 '마네'가 평범한 하얀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을 그린 그림에서 그저 하나의 하얀 줄기나 막대같이 표현하기보다, 눈으로 보이기에 놓치기 쉬운 디테일, 명암과 색으로 하나하나에 깊이를 더해 표현함으로써 아스파라거스를 작품으로 잘 표현한 예를 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결혼생활이나 연인관계에서 너무 당연해져 놓치는 상대방의 좋은 성격, 빼어난 자질, 그리고 사랑의 가치 등 이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커플의 일상생활에서 잊지 않고 물감의 층처럼 덧칠하는 것이 '그저 뻔한 관계, 혹은 뻔한 사랑' 이 아닌 우리에게 '소중한, 감사한' 배우자와 충만하게 사랑을 지속할 수 있다는 글의 내용입니다. (의역으로 책 일부를 언급합니다.)
40년의 결혼생활
'내가 혹은 내 자식들이 얼마나 잘났고, 어디에 살고, 무슨 직업을 갖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느냐'가 아니라 40년을 함께하며 공통된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나와는 다른 관심사와 성격을 가진 동반자를 이해해주고, 도와주며,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사소한 순간에도 웃으며 그런 아이 같은 면마저도 사랑스럽게 자랑할 수 있는 관계. 가난과 역경이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나 고통이 아니라, 삶의 풍파에도 튼튼한 방패막이자 방파제로 잘 쌓아둘 수 있는 관계.
결혼 40년 차 부부인 그들과 함께한 1박 2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와 고랑이는 해장으로 콩나물국에 찬밥을 말아먹으며 G와 F의 큰 환대와 그들이 부부로써, 그리고 한 개인의 삶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서로 느낀 점들을 이야기해봅니다.
벨기에에서 잠시 살았던 적인 있는 고랑이는 구* 지도 페이지를 열어 지역마다 사람들의 성향이나 그들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 덧붙이는 말을 해주었고, 저는 그런 고랑이의 배려와 설명에 칭찬을 하며, 다음에 G와 F를 만날 때, 며칠 실온에 두고 토스트 해서 먹으면 좋을 빵을 집에서 구워가는게 어떻겠냐고 고랑이에게 물어봅니다.
유자마카롱 : 근데, 고랑이. 벨기에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만큼이나 술부심 있는 것 같아.
고랑이: 벨기에 사람들 술 잘 마시지. 그래도, 술부심은 한국이 세계 최고 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