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우드 오락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에는 늘 침대에 누워 TV를 보셨고, 어머니는 항상 바쁘게 집 안 일을 하시고 계셨으며 많은 경우 화가 나 있었다. 여름휴가에 바캉스를 가거나 주말에 가족 나들이를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형편도 형편이지만, 아버지는 주말엔 편하게 쉬는 걸 가장 좋아했고 그 휴식은 대체로 침대 위에 누워 하루 종일 TV를 보다가 잠에 드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다른 집들은 주말마다 어딜 간다던데, 옆 집 혜인이네는 이번 주말에 어딜 간다던데... 하시며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자신을 가여워했다. 그래서 엄마는 우리를 극장에 데리고 가셨다. 적은 돈으로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제공해 줄 수는 수단. 그렇게 나는 영화를 만났다. 그리고 그때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 영등포 난곡동의 어느 작은 극장에서 보았던 엄용수 내레이션의 <공룡시대>, 같은 극장에서 외사촌 누나들과 봤던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 친척 집을 가는 길에 간판을 보고 너무 재밌어 보여 한참을 보여달라고 부모님께 생떼를 부려 겨우 볼 수 있었던, 우성 극장에서 본 <빽 투 더 퓨쳐 3>, 아버지가 공짜표를 얻었다며 주말 아침 명동까지 나가 엄청나게 긴 줄을 섰던, 그날이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발매일이라 줄을 서는 내내 '하여가'가 들렸던 중앙 극장에서의 <쥬라기 공원>...
(개그맨 김정식 씨는 당시 조폭 개그 같은 걸로 인기가 있어서 이런 영화를 많이 찍었다. 임하룡 씨와 합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른 대표작인 <슈퍼 홍길동> 시리즈에서도 임하룡 씨가 스승, 김정식 씨가 제자인 초능력 홍길동으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스승의 이름이 '꽁초도사' 였던 기억이 나는데 어린이용 영화 캐릭터에 꽁초도사... 지금으로서는 참 어려운 센스다.)
지금은 대가리가 좀 굵었다고 뭐 촬영이 어쩌고 연출이 어떻고 샷이 붙네 안 붙네. 어쭙잖은 소리를 제법 지껄이고 있지만 어린 시절 내게 있어 영화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통로, 모험과 우정, 희생의 감동과 결국 해내는 의지의 짜릿함 그리고 사랑의 따스함이 있는 설렘이었다. 그것이 80~90년대 헐리우드 상업 영화가 재현해내는 미국의 가치였으며, '시네마'와는 다른 형태로 관객과 만나는 영화의 여러 얼굴 중의 하나였다.
<탑 건 2:매버릭>의 리뷰를 쓴다고 제목을 박아놓고 상관없는 이야기를 참 길게도 주절거렸다.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를 '설렘'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던 그때가. 감독 조셉 코진스키는 10년, 20년이 지나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더 기본에 충실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 영화엔 은근히 없는 것이 많다. 일단 적국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다. 우라늄 원자로를 파괴하라는 미션이 있지만 어느 국가의 어떤 정치세력(혹은 테러 집단)이 소유한 것인지 밝히지 않는다. 1편에 등장했던 캐릭터 혹은 그와 연관이 있는 캐릭터가 아닌 이상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는 배경 설명을 하지 않는다. 적을 격파하지만 적의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없으며 아군은 누구도 사망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부제처럼 온전히 매버릭의 사랑과, 트라우마 치유와,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후대에 전수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국제 관계에서의 정치성, 정치적 올바름,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이건 아주 약간 한 방울 정도 들어감. 하지만 그것도 캐릭터 구성을 위한 것이거나 전작에서 넘어온 것으로 도저히 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등은 모조리 잘라냈다.
그렇게 요즘 상업 영화들이 필수로 집어넣는 요소들을 제거하면서 영화는 단순해진다. 앞서 코진스키 감독이 언급했듯 1~20년 후에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되기 위해 언제든 금방 변할 수 있는 것들을 빼면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가치들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사랑과 우정과 모험과 좌절을 이기는 용기와 화해 그리고 존경. <탑 건 2 : 매버릭>의 세계는 우리가 어느 새에 잊었던, 헐리우드가 제공하는 진짜 꿈의 세계다.
이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탑 건 2:매버릭>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극장에 가는 게 피곤해진 관객들에게 헐리우드가 보내는, 옛 어투로 쓰인 러브레터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절묘하게, 딱 알맞은 시점에 도착했다. 큰 화면과 큰 소리를 가진 극장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앉아 같이 감탄하고, 같이 흥겨워하며 즐기면 된다. 이 영화는 그렇게 소비되기 위해 만들어졌고, 누구나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오래간만에 행복한 관람이었다. 탐 크루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헐리우드 역사에서 이만큼 헐리우드의 정신을 잘 체현하고 있는 배우는 다시없을 것이다. 위대한 배우라고 불리기 손색이 없다.
P.S : <미션 임파서블 5> 이후 계속 연출을 맡고 있는 탐 크루즈의 단짝 크로스토퍼 매쿼리가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 좋은 쪽으로 영향을 많이 끼쳤을 거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