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사람이란, 잊지 않겠노라 가슴 깊이 다짐한 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기억하고 싶은 것도 쉽게 잊어버리는데 하물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일주일만 지나도 내가 뭘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더욱 떠올리기가 힘들어지지 않던가요?
직접 한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 걸 했나?' 싶을 정도로 기억력은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파워 P로서 매사 복잡한 계획은 짜지 못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대 직장인 중 한 명으로서 당장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 적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러니 기억하기로 한 일을 잊어버리는 건, 업무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덜 귀찮고 더 쉽게 어제, 오늘, 내일을 기록하기 위해 업무일지를 씁니다.
업무일지?
그거 그냥 쓰래서 쓰는, 보고를 위한 페이퍼워크 아냐?
'업무일지'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으레 이런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가장 처음 쓰기 시작한 건 가장 단순하고 흔한 형태의 보고용 업무일지였습니다. 엑셀에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을 단순 나열해서 적어넣는 형식으로요. 반복적 업무만으로도 하루를 꽉 채운 날에는 마른 걸레 쥐어짜듯 억지로 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니, 남들은 업무일지 써서 효율적으로 일한다고들 하는데 단순히 퇴근 전에 그날 한 일만 쭉쭉 나열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당췌 모르겠더라고요. 오히려 업무일지를 쓰는 게 더 비효율적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큰 공을 들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뭘 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어떤 일을 진행했는지 이 회사에서 스스로 발전한 점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성과와 기여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음 5가지를 중심으로 저에게 맞게 야금야금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 항목을 입력하거나 연동하거나 체크하는 절차가 적을 수록 좋겠다.
2.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
3. 프로젝트 내용을 함께 기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
4. 일할 때의 분위기나 개인적인 느낌, 함께 든 생각도 곁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5. 솔직한 회고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업무일지를 쓰는 5년 동안 엑셀과 워드, 플래너, 구글드라이브와 트렐로 등을 거쳐 지금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업무일지가 단순히 할 일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커리어와 멘탈 관리를 함께 도와주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업무일지를 쓰면 좋은 점?
그렇게 저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진 업무일지는 처음에 썼던 엑셀 업무일지와는 명백히 다른 장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제각각이겠지만 적어도 제가 쓰면서 느낀 좋은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야 할 일, 하고 있는 일, 끝낸 일을 볼 수 있어 일할 때 헤매는 시간을 확연히 줄여줍니다.
작업물이 진행된 연유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결과물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성과 정리할 때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나에게 맞는 업무 방식을 찾아낼 수 있어 업무 수행 능력을 올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객관적인 시선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어 문제해결 능력을 올릴 수 있습니다.
비공개 회고를 통해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은 부분에서도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왜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어 효능감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뭘 쓰는데..?
이쯤에서 각설하고 제가 쓰고 있는 업무일지의 노션 템플릿을 공유합니다.
노션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커스텀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대로 바꿔서 쓸 수 있지만 기본적인 구성과 쓰임 예시는 아래에 정리해두었습니다.
업무일지 구성
1. 분기별 보드, 아카이빙 보드, 메모 보드
기본적으로 분기별, 아카이빙, 메모 보드로 구분됩니다.
분기별 보드를 통해서는 1년의 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카드 하나에 한 주가 담겨있습니다.
아카이빙 보드(Sprout)는 업무에 필요한 정보 및 자료들을 모아놓는 곳입니다. 요즘에는 주로 디자인 관련 정보나 git 명령어, 도메인 관련 내용을 정리해둡니다. 업무에 필요한 자료들을 가장 가까운 책꽂이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본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메모 보드(구분없음)는 말그대로 뭐든지 휘갈겨놓는 메모장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쓰든지 무방합니다.
2. 한 주의 카드, 5일의 기록
분기별 보드의 카드 하나에는 해당 주차 5일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주말도 추가할 수 있구요)
상단에 목차를 통해 번거롭게 스크롤 하지 않아도 각 날짜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3. 이번 주 할 일
월요일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이번 주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될 일을 쭉 적습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요일별 우선순위를 정할 수도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직하기 전에는 이 영역을 정말 유용하게 활용했는데 이직한 현재 회사에서는 스프린트 주기가 일주일로 거의 동일한 To-do 리스트가 작성되다보니 Weekly To-do 영역보다는 해당 요일의 할 일 목록에 미리 추가해두는 편입니다. 안 그러면 같은 내용을 두 번 작성하게 되더라구요. 상황에 맞게 활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4. 날짜(요일)별 할 일
그날 해야 할 일을 적고 완료한 일은 체크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비고란에는 간략한 메모를 적어둘 수도 있고 원하면 열을 추가할 수도 있어요.
우선순위도 매길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일일이 지정하기보다 할 일을 우선순위 순으로 나열하는 편입니다.
5. 상세 업무 내용은 각 할 일별 상세페이지에
할 일에 마우스를 올리면 '열기' 버튼이 보입니다 각 업무에 대한 상세 내용은 할 일을 눌러 기록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논의가 나왔고 어떻게 지금의 결정에 이르렀는지를 포함한 원페이저를 작성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많은 걸 다 적을 여력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해당 논의가 진행된 메신저 링크만 붙여놓는 것도 충분합니다.
6. 업무 메모와 기타 메모
그날그날 업무에 필요한 메모 혹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깨달음 등을 메모란에 자유롭게 적어둡니다.
업무 메모의 경우, 주로 그날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적는 편이에요. (예를 들면 미팅 전 간략히 준비할 내용을 적거나 코드 수정하기 전 기존 코드를 메모장처럼 백업해 두거나...)
기타 메모는 그날그날 깨달은 바나 느낀 점들을 자유롭게 적습니다. 대체로 화가 많은 날에는 기타 메모의 개수가 그 정도에 비례하더라구요?
7. 일주일을 되돌아보며
저는 주로 주말에 쇼파에 앉아 유튜브를 틀어놓고 간략하게 회고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주를 돌이켜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성가시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너무 오래 들이거나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고를 건너뛰는 횟수는 많아질 테니까요.
대신 항목별로는 짧게라도 꼭 기록합니다. 특히 '칭찬하기' 항목은요. 이때가 아니면 가장 먼저 잊혀지는 게 스스로 잘했다고 여길 만한 일입니다. 그러니 칭찬은 할 수 있을 때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쉬운 점과 부족한 점이 있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액션 아이템을 적어둡니다. 막연하게 '~해야겠다'라고 문장으로만 적는 것보다 효과가 좋습니다.
8. 이번 주를 한마디로
회고하면서 적은 '이번 주를 한마디로'의 내용은 바깥의 분기별 보드의 카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노션의 AI 기능을 이용해서 카드에는 자동으로 업데이트가 되기 때문에 번거롭게 옮겨적을 필요도 없어요.
더불어 최상단 이모지 설정을 통해 그 주의 느낌을 이모지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카드가 쌓이게 되면 그동안의 '한마디'들과 이모지를 모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해골이나 머리가 터지는 이모지, 토하는 이모지, 우는 이모지 등만 가득한 시기도 있는데 용케 버텼구나, 하고 스스로 기특해하는 제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업무 일지는 쓰는 사람도 있고 안 쓰는 사람도 있으며 쓴다고 해서 모두가 일잘러가 되는 것도, 안 쓴다고 해서 망나니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향과 취향일 뿐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가면 될 것이고, 업무일지를 쓰더라도 각자 입맛에 맞는 가장 편한 형태가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그걸 알기 위해서 오늘을 기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