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이 세상의 빌리였었다
영화 빌리엘리어트는 시골 탄광촌 소년의 발레리노로써의 성공을 다룬 성장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 성장 스토리는 단순히 소년이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를 하는 클리셰의 성격을 지니진 않는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프레임에 대해 뭐가 옮은 것인가 하며, 발레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의 전체주의적 통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프레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사랑이라는 감성적 소재를 통해 부드럽게 풀어내고 있다.
먼저 영화는 관객들 각각의 내면에 있는 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우리가 유년기때에 가지는 꿈을 이루는 데까지 여러 방해했던 요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 요소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암묵적으로 규정화된 프레임의 형태로써 돌출되어 왔었다고 상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프레임들은 어떠한 형태로써 우리에게 다가왔을까?
영화가 언급하는 꿈을 방해하는 첫번째 프레임으로 타율적 생계추구 프레임이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4년 영국의 마거릿 대처수상이 연임하여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이미 석탄의존도가 현격하게 줄어들어버렸던 1984년에 대처는 노조에게 굴복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결국 대처가 파업을 1년이나 버틴끝에 항복을 받아냈고 광부들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탄광은 폐쇄되었고 석탄산업은 민영화의 길을 걷게되었다. 그리고 대처는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한편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정책은 많은 비난을 받은바 있다. 이때, 달드리 감독은 삶의 생존권 다툼을 격렬하고도 냉혹하게 가감없이 터치하기 위해서 이같은 시대적 배경을 밑바탕에 두었던것으로 추론한다.
실제적으로 각 가정의 자녀들이 개인의 꿈을 실현 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가계 경제의 안정을 이루지 않고는 실현이 불가능하도록 우리사회는 강력하게 구조화 해왔다. 이는 시대가 더욱 경제논리와 발맞추어 경제 발전속도와 비례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옛말이 되었다는 말이 있지도 않은가? 그만큼 꿈의 발전 동력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가계경제의 안정화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극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사회의 가계경제에 대한 압박을 그리면서 가족의 희생을 처절하게 그려낸다. 빌리의 꿈에 점점 다가설 수록 가족은 기뻐함과 동시에 빌리를 위한 노동과 개인 소신의 굴복이 잇따른다.
이러한 논리의 구조를 영화는 골목길 샷을 비롯한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는 샷에는 상승과 하강의 샷으로써 더더욱 극적으로 비추어낸다. 그만큼 올라간다는 상승의 의미를 가진 꿈의 실현과 처절한 하강의 의미를 지니는 희생으로써 꿈과 가족의 희생인데, 이는 달드리 감독의 굉장한 인문학적 논리의 구조일 것이다. 희생과 꿈의 실현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연결고리로써 이어주고, 이를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 개념은 영화의 샷을 통해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즉, 얻는다는 것은 희생이 따른다는 인문학적 논리를 빌리의 꿈에도 대입을 시킨것이다.
또 그러한 장면은 빌리의 형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영화 중반, 선생님과 함께 음악에 춤추는 빌리와 헤드폰을 끼고 듣는 형의 모습을 교차편집을 함으로써 형도 음악을 즐기고 순수한 꿈이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어린 빌리와 달리 형은 꿈을 위한 싸움이 아닌 그저 생계를 위해 싸울뿐이다. 즉, 우리가 순수한 꿈을 찾는데 있어서 제일 큰 방해요소가 사회(정치)로부터 점철된 가족의 생계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아닌 희생하는 사람의 관점으로서 굉장히 심적으로 힘들다는 것도 영화는 설명해준다. 겨울에는 땔감을 살돈이 없어 먼저 가버린 아내의 유품이었던 피아노를 부숴서 착잡하게 난로에 넣는 장면과 노조문제로 빌리의 형과 대립하며 우린 빌리에게 해줄것이 없다면서 울부짖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너무 가혹한게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두번째 프레임으로 성역할에 관한 프레임이 있다.
영화의 배경을 보수적인 영국 그 중에서도 탄과촌으로 설정함으로써 우리 시대 보수적 시각 프레임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남자는 권투, 여자는 발레라는 성역할론을 인입시키고, 그 프레임을 충돌시켜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권투연습장에서 발레를 한다는 설정은 서로간의 상징을 해학적으로 충돌시킨 영화적 장치이다. 그 충돌된 공간속에 자라나서 결실을 맺는 빌리의 꿈(발레리노)은 극적이지만 보수적 시각의 상식선에 펀치를 날린다. 아마 우리의 진로를 정할시기에 남자는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여자는 어떠한 일을 해야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지시에 시달려 왔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빌리 또한 우리 같이 끊임없이 내적 갈등과 생각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는 우리가 겪는 성장과정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와 빌리는 조금 달라진다. 빌리는 계속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며 나를 믿어갔지만, 이때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하기 보다는 그 프레임에게 이게 맞느냐고 확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 그래서 영화는 묻는다 과연 우리가 가진 성역할이 중요한가아니면 그 속에 순수한 진정성이 중요한가하고 말이다. 내 안에 진정으로 꿈틀거리는 열정은 뭐냐고 사회가 규정한 프레임이 맞는건 아니라고 말이다.
또한 여기에 게이라는 성정체성의 문제를 한번 더 거론하면서, 다시 한번 기존의 보수적 관점에 경종을 울린다. 동성간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빌리의 대사는 여기에 더 상식 비틀기를 한다. "나는 발레를 좋아하지. 게이는 아니라고.." 이는 남자의 성정체성 혼동이 발레를 하게만든 원인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관객에게 주지시켜 준다.
위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여 우리는 빌리엘리어트를 보고나서 굉장한 대리만족의 기분이 들곤한다. 내 유년시기는 결국 프레임에 순응하고 말았지만 빌리는 프레임을 깼기 때문에 일것이다. 누군가는 피아니스트 빌리를, 누군가는 가수 빌리를, 누군가는 화가 빌리를 각각 자신만의 꿈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곤 했던 것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엄격한 사회의 통제와 프레임 속에 그 꿈은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순응을 해버렸다. 가수 빌리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피아니스트 빌리에서 평범한 공무원으로.. 그렇게 우리는 사회의 프레임에 적응 아니 순응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빌리엘리어트가 되기 위해서는 방황하는 시기 및 꿈이 자라날 시기에 필요한 조력자와 가족의 희생, 그리고 내 자신의 순수한 열정이 필요하다. 영화에서는 열정적인 선생님이 있었고, 아버지와 형이 아들(동생)을 위해 희생이 있었고, 하루종일 춤추며 새가 되는 것 같다는 빌리가 있었다. 허나 우리 현실에서는 이 세가지 요인중에 하나가 빠져서 결국 꿈을 이루는 방해요소에 굴복하여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약조건 속에서도 성공한 이는 있긴하다.
그러나 실제 사연들은 우리 주변의 얘기이지만, 마치 현실이 아닌 영화 속 영웅의 이야기인듯 들린다는게 문제일듯 하다. 우리는 이것을 과연 사회의 문제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문제로 돌릴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딜레마 인듯하다. 또 최근에 들어와서도 흙수저, 금수저 문제며, N포 세대의 꿈을 접는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건 누구의 탓이나 내 잘못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잔혹한 결론이지 않을까 한다. 희생을 하지 않은 가족의 탓도 아니고, 조력자를 만나지 않은 운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프레임을 깰 수 있을 만한 나의 용기와 열정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세가지 요인 간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것 뿐이지 않을까.
프레임을 깨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 나약하며 어렸고, 아니면 가족이 나를 희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달성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잠시 내 꿈을 접었던 것으로 생각하면 가족 전체의 관점으로 볼땐 내가 빌리의 형이 된것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것이 더 인륜적 가치가 있던 것 아닐까?아니면 꿈틀대는 열정의 인사이트를 발견하여 빌리같은 인물을 키워내는 선생님이 되는것도 매우 큰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라도 우리는 기준의 갖었던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모든 빌리를 비롯한 과거 빌리였었던 나에게 박수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것은 어떨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