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 14살의 구하나
2003년 11월 10일 월요일
구름 끼고 쌀쌀함
한 덩어리였던 대륙이 여러 개로 분리되었던 것처럼, 삼삼오오 모여 놀던 여자애들의 무리가 여러 번 쪼개졌다 붙었다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애들이 있었다. 점처럼 남은 애들은 다른 무리를 기웃거리거나 그냥 점으로 존재했다. 점들끼리는 뭉치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문이슬도 표류하던 점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점이었던 건 아니다.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문이슬이 점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혜지와 설아도, 아니 우리 반 애들 대부분이 문이슬이 점이 되었다는 걸 스스로 깨우쳤다. 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듯이.
표류하던 문이슬은 우리에게로 왔다. 혜지도 설아도 딱히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때 내가 단호하게 싫다고 말했다면 뭐가 좀 달라졌으려나.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을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차피 그때는 문이슬을 딱히 거절할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내 귀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혜지와 설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오직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처음엔 약간 거슬리는 정도였다. 귓가에서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그랬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덧 혜지와 설아 그리고 문이슬의 말을 집어삼킬 정도가 되었다.
내가 들을 수 없는 셋의 대화가 점점 늘어났다. 셋이서만 쪽지를 주고받거나, 셋이서만 키득거리며 귓속말을 하거나. 하루는 내가 대화에 끼려고 몸을 움직이자 문이슬이 말했다. “하나야 미안한데,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문이슬의 말과 함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문이슬이 양옆으로 혜지와 설아를 끼고, 저만치 멀어져 갔다.
며칠 뒤 수행평가 때문에 보러 간 콘서트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콘서트 도중 셋이서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나를 버리고 콘서트장을 나가버렸다. 주변에 있던 우리 반 남자애가 말했다. “구하나, 너 왜 혼자 버려졌어?”
왜 나갔냐는 나의 문자에 “우리 가려고. 너도 나와.”라는 말만 돌아왔다.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이. 셋이서만. 왜. 나만 버리고. 왜. 왜. 왜. 왜. 왜. 왜. 다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를 덮을 정도로 크게. 그리고 그 소리는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붙어있을 줄 알았던 땅에서 삐거덕거리며 내가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이번엔 내가 점이 됐다.
“쟤네 말고 그냥 우리랑 같이 놀아.”
점이 된 나를 영현이가 끌어당겼다. 그렇게 다시 한번 우리 반 여자애들의 무리가 쪼개지고 붙어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냈다. 영현이네 무리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 날 저녁, 혜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혜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답장을 보내는 대신 그 문자를 보관함에 저장했다.
문이슬과 떨어지고 나서부터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부름으로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그 소리가 다시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 애를 불렀을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랑 놀지 말라고 말하는 거면 어떡하지. 그 애가 다시 나에게 올 때까지, 아니 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다시 시작될까 봐 불안함에 떨곤 했다.
“점심시간에 승주랑 같이 밥 먹지 말고, 우리 셋이서만 먹자.”
영현이가 나와 지민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영현이와 승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영현이가 승주를 불러내 기분 나쁜 점을 지적할 때도 함께 거들었다. 나는 기분 나쁜 점이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다시 또 한 번 대륙이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떨어져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