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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Sep 23. 2021

깁스를 했다. 근데, 왜 하필...

5P. 14살의 박주영

1998년. 10월 21일

날씨 캡 좋다.


학교들은 왜 꼭 산 꼭대기에 있는 걸까? 초등학교 때는 스쿨버스를 타고 다녀서 상관없었는데 이놈의 중학교는 시발 진짜 산 꼭대기에 있는데 걸어 다녀야 한다. 이게 문제다. 내 탓이 아니고! 학교가 산에 있기 때문이다. 


어제 학교 끝나고 김정숙이랑 같이 최고 속도로 내려오다가 내리막 끝에서 '촥!' 하고 착지를 했는데 뭐가 '우직'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하면서 다음 걸음을 딛었는데 역시나, 왼쪽 발목이 진짜 미친 듯이 아프더라. 불에 덴 것처럼 갑자기 엄청 뜨겁기도 하고. 김정숙한테 "야 내 다리 뿌라진 것 같다." 했는데 안 믿고 한참을 웃더라.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하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알 게 된 듯. 나쁜 년. 

김정숙이 학교로 다시 가서 선생님 불러 주고, 엄마한테 전화드렸다. 엄마가 데리러 오셔서 학원도 띵가뽕 하고 병원 갔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엑스레이도 찍고 바로 통 깁스를 당했다. 

내가 깁스를 했다. 와 누가 보면 운동선순 줄 알겠네. 


시발 나는 진짜 미친년인가. 근데 기분이 조금 좋더라. 드라마 같은데 보면 깁스하고 그 위에 낙서하고 이러는 거 봤었는데 나도 그걸 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또라이 아니냐고. 병원에서 받아온 목발에 매직으로 그림도 그렸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래도 한 달 정도는 내랑 한 몸이 되어야 할 테니까 나와 어울리도록! 평범한 목발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지! 조금 색깔 있는 목발이 된 것 같아서 맘에 든다.


근데 큰일 났다. 문제가 크다. 이제부터 짱나는 이야기만 쓸 거다. 뭐냐면, 다다음주가 체육대회고 나는 축구랑 농구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축구는 그렇다 쳐도 농구는 진짜 내가 제일 잘하는 거 같은데 내 없이 될랑가 모르겠다. 일요일에 엄마 졸라서 새 운동화도 사 뒀는데. 너무 짜증 난다. 진짜. 아 맞다. 이 운동화 이야기도 써야 된다. 엄마는 왜 자꾸 큰 신발을 사주는 건지? 나는 딱 맞게 신고 싶은데 운동화를 한 치수나 크게 신으라고! 발 뒤꿈치에 손가락이 세 개는 들어가고 헐떡거리는데 진짜. 안 그래도 큰 발이 신발을 크게 신으니까 더 커지는 것 같아서 짜증 난다. 

초등학교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중학생 되니까 큰 게 싫다. 키는 엄청 큰 게 아니라서 괜찮은데 발이랑 손이랑 다른 애들이랑 비교해 보면 확실히 크다. 허벅지도 두껍고 팔목 뼈도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두꺼운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나는 뼈도 크고 두꺼운 것 같은데 발목은 왜 뿌라졌지?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아 시발 또 짱나네.


아무튼 다시 체육대회로 돌아와서, 오늘 애들 모아놓고 내 대신 선수 한 명 더 있어야 한다고 작전회의를 했다. 축구는 선수 많으니까 괜찮고 정소은이 농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금마는 키도 좀 크고 달리기도 빠른 것 같아서 골 넣는 거만 좀 가르쳐 주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애들도 그러자고 했고 점심 먹고 이야기했는데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하더라. 미친 거 아니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걸 엄마한테 물어보는지. 재수 없어서 그냥 애들한테 다 물어봤는데 하고 싶다는 애들이 별로 없더라. 애들이 그랬는데 정소은은 너무 여자라서 농구 안 할라고 하는 거라고 했다. 너무 여자는 뭔데? 또라인가? 여자는 농구하면 죽나? 여자는 농구하는 거 엄마한테 허락 안 받으면 죽나? 농구하는 애들은 대충 여자 뭐 그런 건지? 아니 잘 모르면 그냥 좀 시키는 대로 하던가. 반장 말 더럽게 안 듣는다. 시발 다 짱나서 다 패삐고 싶었다. 일단은 지금 있는 애들로 연습하고 다음 체육시간에 체육쌤이랑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하여간 진짜 다 짜증 난다.


아빠가 퇴근하고 내 깁스한 거 보시더니 그랬다. "아가씨가 다리를 이래가 어짜노."라고. 내가 다리를 뿌수고 싶어서 뿌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갑자기 막 눈물이 났다. 왜 그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다리가 뿌사져서 체육대회를 못 나가게 된 게 서러운지, 아가씨가 다리나 다치고 다닌다는 말이 서러운 건지. 내가 이런 성격인 게 서러운 건지. 다 모르겠어서 눈물이 났다. 시발 시발.

엄마도 내를 서럽게 했다. 왜 계속 화가 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친 건 난데. 아픈 사람이 제일 속상한 건데. 엄마는 계속 "네가 그래 털팔이처럼 뛰 댕길 때 알아봤다. 가시나가 이게 뭐고" 하면서 화를 내셨다. 왜 어른이 되어서 내 맘을 먼저 알아주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이건 진짜 생각하기 싫은 거지만 혹시나 그런 건 아닐까? 엄마도 아빠도 여자 같고 얌전하고 말 잘 듣고 뭐 그런 딸이 갖고 싶으셨을 텐데 내 같은 게 딸로 나와서, 내 같은 게 태어나서 다리도 뿌수고 댕기고 그래서 화가 나신 건 아닐까? 내가 맘에 안 드는 딸인 거지. 하 뛰지 말 걸. 아니면 착지라도 살살할 걸.

아 쓰다 보니 또 눈물 날라 그런다. 시발 시발 시발!!


새로 산 운동화도 못 신고 체육대회도 못 나가고 깁스한 다리는 벌써 간지럽고 냄새나는 것 같고 아가씨고 가시나가 다리나 뿌수고 다니고 애들은 말 안 듣고 시발 뭐 하나 안 서러운 게 없다. 14살 인생 진짜 짱난다.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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