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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Oct 06. 2021

<숲에서 소리가 들리면>

다락방의 미친 여자

등장인물

용주

희경

수영

정미

    

해 지는 저녁

   

끝이 보이지 않는 숲 속

 



용주와 정미가 수다를 떨며 숲 속을 걷고 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멀리서, 무언가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용주는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본다.

    

용주 : 무슨 소리 안 들려?

정미 : 소리?


용주와 정미, 가만히 서서 주변 소리에 귀 기울인다.     


정미 :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였는데?

용주 : 뭔가 쓸리는 소리?

정미 :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아니야?

용주 : 그런가. 모르겠다, 가자. (다시 걸으며) 여기 해지니까 분위기 장난 아니다. 이상한 소문이 생기는 이유가 있네. 진희도 데려올걸.

정미 : 걔 여기 못 와. 오줌 쌀걸.

용주 : 그러니까 데려와야지.

 

용주와 정미,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 소리 사이로, 무언가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용주는 웃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린다.     


정미 : 왜, 또.

용주 : 다시 나는데? 이 소리 안 들려?


정미는 소리에 집중해 보지만, 용주에게 들리는 소리가 정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정미 : 뭐야, 장난치지 말고.

용주 : 장난 아닌데. 나만 들리는 거야, 이거?


정미 : (코웃음 친다) 야, 야. 그런 거 임진희한테나 통하지, 나한텐 안 통하거든.


용주, 귀로 들리는 소리를 입으로 낸다.


정미 : …왜 그래, 너. 장난치지 말라니까.

용주 : (계속 소리를 낸다)…

정미 : (입을 막으며) 하지 말라고, 진짜.

 

무언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멈추더니, 누군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소리 또한 정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용주 : (두리번거리며) 누가 울고 있어. 이 소리도 안 들려?

정미 : 거기까지만 해. 나 화낼 거야.


용주, 씨익 웃더니 발걸음을 옮긴다.

  

정미 : 어디 가?

용주 : 저쪽에서 나는 것 같아, 소리. 가 보자.

정미 : 이 미친년이 진짜!

용주 : 왜? 겁나? 진희 보고 그렇게 쫄보라고 놀려대더니.


용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계속 걷는다.


정미 : 연기하지 마라, 나 다 알아. 너 지난번 과학 시간에 쓰러진 것처럼 연기하는 거잖아.

용주 :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내가 연기하는 건지 아닌지.

정미 :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너, 너, 너 이러려고 여기 오자고 한 거지. 진짜 나 다 안다.


용주는 수풀을 헤치며 소리의 주인공을 찾는다.

하늘이 이전보다 많이 어두워졌다.     


정미 : (용주를 멈춰 세우며)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자.

용주 : 먼저 가.

정미 : 좀 있으면 어두워져서 길 못 찾는다고!

용주 : 상관없는데. 안 무서워. (걷는다)

정미 : (쫓아가며) 나 그냥 간다? 너 밤새 여기서 혼자 있든 말든 버리고 간다고!

용주 : 가라고!

  

정미, 용주와 반대쪽으로 가려다가 무서워서 다시 돌아온다.


정미 : 너, 애들이 말한 그 귀신 만나도 나는 몰라.

용주 : (수풀을 헤치며)…

정미 : 교장 선생님 누나처럼 영영 사라져 버려도, 나는 몰라.

용주 : (수풀을 헤치며)…

정미 : 내일 아침에 너, 수봉 할미네 딸처럼 하루 사이에 폭삭 늙은 몸으로 나타나도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멈춘다. 용주의 손도 멈춘다.

고요하다.


그때, 고요한 숲에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린다.

갑자기 동물 무리가 튀어나오거나 날아오르는 소리.

용주와 정미, 놀라서 자빠진다.


용주 : 뭐야…?

정미 : 뭐긴 뭐야, 새 날아가는 소리지. (웃으며) 혼자 센 척은 엄청 하더니. (일어나 옷을 털며) 너 땜에 이게 뭐냐. 옷 다 더러워졌잖아.


용주도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쉽지 않다.     


용주 : 나 손 좀 잡아줘.

정미 : 얼씨구? (용주를 일으켜 세우며) 가지가지한다. 가지가지 해. 너 이거 임진희한테 다 말해 줄 거야.

용주 : 말하기만 해. (옷을 털며) 나도 너 빌빌거렸던 거 다 말할 테니까.

정미 : 내가 뭘 빌빌거려. 웃기지도 않아.


정미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용주도 정미를 따라 걸음을 떼려는데, 왼쪽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용주 : 정미야. 나, 발이 안 움직여.

정미 : 1절까지만 해라. 우리 늦었어! 빨리 가야 돼.


다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에게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 소리.

용주가 귀를 막아보지만, 소리는 점점 커진다.


용주 : (다급하게) 나, 나 좀 끌어줘. 빨리. 빨리!


정미가 용주를 힘껏 잡아당겨보지만 소용없다.

용주의 발이 무언가에 붙잡힌 것 같다. 둘은 겁에 질린다.


그때, 고요한 숲에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다시 한번 동물 무리가 튀어나오거나 날아오르는 소리.

정미,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용주 : 야! 어디가! 야!     


용주, 왼쪽 발이 움직이지 않는 사실도 잊은 채, 무리해서 달려 나가다가 넘어진다.

머리를 세게 박았는지 정신을 잃는다.


 사이.


용주가 있던 근처에서 희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몸에는 가방이 달려있는데, 무게가 상당해 보인다.

희경, 가방을 끌며 용주에게로 와 용주를 살펴본다. 바르게 눕히고, 가방에서 반창고 등을 꺼내 상처를 치료해준다.


용주, 깨어난다. 흠칫 놀란다.


희경 : 밤늦게까지, 겁도 없이.

용주 : (상처가 아프다)…

희경 : 얼굴하고 다리는 또 이게 뭐야. 칠칠맞게.


희경, 치료를 마치고 가방을 싼다. 일어나서 가방을 메는데, 무게 때문에 휘청인다.

용주는 그런 희경을 본다.


희경 : 계속 그렇게 혼자 앉아 있을 거야? 밤이 길어, 얼른 걸어야지.


희경이 걸음을 옮긴다. 용주, 벌떡 일어나 희경을 따라간다.


용주와 희경은 한참을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희경이 잠시 멈춰서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용주 : 힘들어? 조금 쉴까?


용주는 희경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희경 :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어깨야…, 아이고 다리야….

용주 : (희경에게 안마를 해주며) 가방이 너무 무거운 거 아니야?

희경 : 아이고…, 아이고 시원하다.

용주 : (더 열심히 안마한다)…

희경 : 손이 야물딱져서 예쁨 받겠다.

용주 : (계속 안마한다)…

희경 : 그만하면 됐어, 이제. 너도 여기 앉아서 좀 쉬어. 또 한참을 걸어야 되니까.

용주 : …아까, 왜 울고 있었어?

희경 : …들렸어?

용주 : 응.

희경 : 까마득해서.


희경,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쉰다.

용주는 그런 희경을 보다가 결심한 듯 일어서서 돌을 줍는다.


희경 : 뭐해?

용주 : 구조 요청 하려고. 책에서 본 적 있어.

희경 : 소용없어.

용주 : 왜?

희경 : 다 해 봤어. 아무도 안 왔어. (일어서며)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만 일어나자.


용주와 희경은 또 한참을 걷는다.

용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희경 : 배고파?

용주 : (고개를 끄덕인다)…


희경,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 상을 차린다. 반찬이 부실하다.

둘은 밥을 먹는다.     


용주 : 이게 다야?

희경 :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용주 : 가방 안에 낙지볶음도 있던데…. 그거 먹으면 안 돼?

희경 : 안 돼. 용훈이 주려고 한 거야.

용주 : 나도 좋아하는데….

희경 : 빨리 먹어.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


용주와 희경,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참을 걷는데, 희경이 다시 낑낑거린다. 그때, 용주가 가방을 함께 든다. 

희경이 용주를 본다.


용주 : 둘이 드니까 좀 낫지?

희경 : (계속 걷는다)… 

용주 : 훨씬 가벼워졌지?

희경 : (계속 걷는다)… 

용주 : 나밖에 없지?

희경 : 그래, 그렇네. 고마워.

용주 : (웃고는) 어우, 근데 이걸 혼자 어떻게 들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네.

  

용주와 희경, 함께 가방을 들고 한참을 걷는다.     


용주 : 잠깐만, 잠깐만 쉬자. 팔 빠질 것 같아.

희경 : 얼마나 걸었다고.

용주 : 죽을 것 같아.

희경 : 엄살은. 이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도착해.

용주 : 딱 5분만.

희경 : (한숨을 쉬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내 팔자야.

용주 : 대체 가방에 뭐가 든 거야?


용주, 가방 안을 본다.     


용주 : 세상에, 이러니까 가방이 무겁지. (가방에서 물건을 뺀다)

희경 : 뭐 하는 거야?

용주 : 용훈이 물건, 다 빼게. 이거 다 짊어지고 못 가.

희경 : 됐어. (용주가 뺀 물건을 도로 담는다)

용주 : 걔도 다 컸어. 우리가 이럴 필요 없어.

희경 : 들기 싫으면 마. 나 혼자 들면 되니까. 괜히 핑계는.     


희경, 가방을 메고 일어선다.     


용주 : 같이 들어.

희경 : 놔. 놔!

용주 : 혼자 힘들잖아.

희경 : 됐어! 걸그적거려.

용주 : 같이 들자고. 밤이 길다며, 빨리 가야된다며.

희경 : 필요 없다고. 놓으라고.      


용주와 희경, 실랑이하다가 희경이 넘어진다.     


용주 : 괜찮아? 그니까 왜 자꾸 고집을 부려. 어디 봐봐.

희경 : (아파하며) 가방에서 파스 좀 꺼내 봐. 거기 앞주머니에.

용주 : (파스를 건네며) 걸을 수 있겠어?

희경 : 그럼 걸어야지 어떡해.


다시, 숲에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린다.

날이 점점 추워진다.     


용주 : 나한테 기대. 가방도 나한테 주고.     


용주, 가방을 메고 희경을 부축하며 걷는다.     


용주 : 좀 괜찮아?


희경은 답이 없다.

용주, 희경과 가방을 모두 짊어지고 걷는다. 헉헉거리는 용주의 숨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때, 먼 곳에서 자동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용주는 한 손을 크게 흔들어 차를 멈춰 세우려 하지만, 차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용주 : 잠깐만,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봐. 우리 저 차 잡아야 돼. (양손을 흔들면서) 여기요,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자동차는 소리치는 용주를 지나친다.

용주는 자동차를 뒤쫓아가기 시작한다.     


용주 : 사람 있어요! 사람 있다고! 이 개새끼들아! 멈추라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용주와 자동차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자동차는 점이 되어 사라진다. 용주는 털썩 주저앉는다.


용주는 고개를 돌려 희경이 있는 쪽을 본다. 너무 멀다.

용주, 일어서려는데 가방 무게 때문에 휘청거린다. 용주는 가방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 여기저기 집어던진다.


용주 : 내가 진작에 버리자고 했지? 그랬으면 좋았잖아. 지긋지긋해. 전부 다 지긋지긋하다고! (흐느낀다)


용주의 흐느끼는 소리가 숲을 가득 채운다.

잠시 후, 수영이 손전등을 비추며 들어온다. 


수영 : 분명, 이 근처인 것 같은데.


수영, 손전등을 용주에게 비춘다.     


수영 : 거기서 뭐해?

용주 :

수영 : 소리 듣고 왔어.

용주 : 소리…?

수영 : 응. 왜 그러고 있어?

용주 : …아무것도 아니야.     


수영, 손전등을 여기저기 비추다가,

저 멀리 앉아 있는 희경을 발견한다.


수영 : 할머니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가지 말랬잖아.

용주 : 낙지볶음도 나는 빼고 네 삼촌만 주더니. 어쩜 그렇게 나는 쏙 빼고 네 삼촌만 기억해.

수영 : 가지 마, 이제. 기억도 못 하는 사람 수발 들어서 뭐 해.

용주 : 이젠 안가. 요양원에 모시라고 했어.

수영 : 일어나. 배고프다, 밥 먹자. 그만 울고.


용주와 수영 일어난다.

수영, 걷는다.

용주가 수영을 부른다.


용주 : 엄마랑 이것 좀 같이 들어줘. 너무 무거워.


막.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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