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 17살의 구하나
2006년 4월 6일
해는 떴는데 어제보단 쌀쌀함
어떻게 하면 학교를 그만둘 수 있을까. 요즘 고민은 그뿐이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하늘이 시꺼메져 있었다. 교실엔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형광등을 켜 둔다. 만약 어른이 돼서, 열일곱의 지금을 떠올리면 어둡고 차가운 이미지로 가득하겠지.
배에 자꾸 가스가 차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팬티스타킹을 신고 의자에만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가? 은희는 쉬는 시간에 못 참겠다며 가위로 스타킹 밴드 부분을 살짝 잘라냈다. 하얀 조각들이 교실 바닥 위로 떨어졌다. 하얀색 스타킹이라니.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스타킹만 검은색이었어도 교복이 좀 덜 펭귄 같아 보일 텐데.
우리의 불만에 사회 선생님은 말했다. “너희 선배들이 스타킹 바꿔보겠다고, 다른 색 스타킹 신고 패션쇼까지 했었어. 그런데도 하얀 스타킹이 제일 나아서 안 바꾸기로 한 거야.” 거짓말. 남색과 검정색이 안 어울린다고? 비 오면 흙탕물 때문에 달마시안이 되는 흰 스타킹이 가장 낫다고? 인정할 수 없다.
드르륵 쾅.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더니 국어 선생님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너 그거 가지고 나와.” 몽둥이 끝이 가리킨 곳은 지영이었다. 지영이가 파란 표지의 책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그 이후로 들리는 매타작 소리. 퍽. 퍽. 퍽. 너 내가 아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책 읽지 말고 공부하랬지. 퍽. 퍽.
지영이는 훌쩍이며 빈 손으로 교실에 돌아왔다. 지영이가 읽던 건 소설책이었다. 일본 작가의 소설이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였나 에쿠니 가오리였나. 인터넷 소설도 아니고, 문학책이었는데.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저렇게 말하니까 답답하다. 소설책 읽는 건 공부가 아닌가?
이곳 선생님들의 이상한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까 보충수업 시간만 해도 그렇다. 애들을 한 명씩 일으켜 세워서 해석을 시키는데 직독직해를 하지 않으니까 해설집 베껴서 그대로 말한다며 뒤로 나가라고 했다. 직독직해로 해석했지만 틀린 애들도 모두 뒤로 나가라고 했다. 조금 버벅이거나 순서만 잘못 말해도 뒤로 나가야 했다. 이야기의 결론은 뻔하지. 뒤로 나간 애들은 한 대씩 맞았다. 다행히 오늘 나는 걸리지 않았지만, 내일 걸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영어 수업 들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내가 배우려고 학교에 오는 거지, 다 알면 학교에 왜 와?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왜 저렇게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때리는 거지? 그렇게 겁주면 알고 있던 것도 틀리겠다. 문득 얼마 전까지 다녔던 학원이 떠올랐다. 1번 틀린 사람 손들어. 학원 선생님은 돌아다니며 손바닥을 때렸다. 2번 틀린 사람 손들어. 또 선생님은 돌아다니며 손바닥을 때렸다. 수업이 끝나고 기억나는 건 매타작 소리뿐이었다.
그 학원에서의 최악은 단어 암기 시험이었다. 매일 소화할 수 없는 분량을 내주고, 일정 점수를 넘지 못하면 매를 맞곤 했다. 가뜩이나 단어 외우는 걸 싫어하는데, 외워야 하는 양이 또 어마어마해서 매번 포기했었다. 맞는 건 정말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때린다고 공부가 되는 건 아닌데. 공부가 된다 쳐도 그게 얼마나 갈 것인지. 그걸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있는지. 사유 없이 점수를 위해 암기만 하면 다인가? 우리나라 교육은 이래서 문제다. 그곳을 겨우 탈출했건만, 다를 바 없는 학교가 내 앞에 서있다.
이곳은 더 숨이 막힌다. 공부 말고도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규칙으로 나를 옥죈다. 가령, 가방의 크기는 A4 클레어 파일이 가려질 정도여야 하고(대체 왜?) 신발은 컨버스는 되는데 컨버스 하이는 안 된다.(아니 왜?) 아무리 추워도 실내에서 외투를 입고 있거나, 체육복을 입고 있어도 안 된다. 그리고 외투는 엉덩이를 꼭 덮어야 한다.(어째서?) 머리는 귀 밑 20cm까지 기를 수 있는데 꼭 묶어야 하며, 머리를 묶지 않으려면 귀 밑 3cm로 잘라야 한다. 그런데 웃긴 건 한 달 동안 머리카락이 평균 2cm가 자라니 18cm로 유지해야 하고, 묶을 때 옆머리를 내면 안 된다.(그니까 왜?)
한 번은 볼륨 매직을 한 직후라, 담임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머리를 풀고 다녔는데 복도에서 한 선생님에게 꿀밤을 맞았다. 말이 꿀밤이지 망치가 머리를 치는 것 같았다. 곱슬머리라 매직을 했고, 매직을 하고 바로 머리를 묶으면 안 돼서 며칠간 풀고 다니는 거다, 담임선생님께도 허락받았다고 말씀드렸는데 말대답한다고 한 대 더 맞았다. 민정이가 대답을 잘못했다고, 그냥 “네, 알겠습니다.” 했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한 대만 맞고 끝났을 테니. 하지만 내가 곱슬머리이고, 매직하고 나서 바로 머리 묶으면 안 좋은 것 또한 사실인걸….
1지망으로 다른 학교를 썼어야 했다. 어떻게든 엄마를 설득했어야 했다. 다른 학교에 입학했다면 조금은 달랐으려나. 모든 게 꼬여 버린 것 같다. 자퇴하고 싶다. 자퇴하고 홈스쿨링 하거나 대안학교에 가고 싶다. 옆반이랑 3반의 누구는 자퇴했다던데. 물론, 소문에 의하면 둘 다 좋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맞지 않는 교복처럼 맞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다.
한 달 전에 두드러기로 일주일간 입원을 했었다.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냅다 “학원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아요.”라고 답했고 그제야 지긋지긋한 폭력 학원을 관둘 수 있었다. 그때가 자꾸 생각난다. 내가 학교를 그만둘 수 있을까. 가방 하나 조차 내가 원하는 것으로 쓸 수 없는 내가. 내 머리카락 하나 조차 어찌할 수 없는 내가. 그런 내가.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