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담다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만추 Oct 25. 2021

얼굴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준비물 : 몸매를 가릴 수 있는 큰 옷 (예를 들면 힙합바지나 오버사이즈 가죽점퍼), 헬멧, 수건 여러 장.

     

수업이 끝나면 준비물을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입고 있던 옷 위로 힙합바지와 가죽점퍼를 입고, 점퍼 안에 수건을 넣는다. 딱딱한 책을 수건으로 감싼 다음 넣어도 좋겠다. 헬멧을 쓴다. 중요한 것은 헬멧 밖으로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나오지 않게 만드는 것. 가방은 어떡하지? 가방은 등산 가방으로만 들고 다녀야겠다.

    

이것은 스무 살을 앞두고, 매일 밤 잠자리에서 그리고 또 그려보았던 나의 귀갓길 풍경. 캄캄한 길거리에서 누가 칼로 찌를지 모르니 점퍼에 수건을 넣고, 누가 둔기를 휘두를지 모르니 헬멧을 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성임을 드러내지 않는 것. 납치되거나 살해당하지 않는 방법을 그리고 또 그리며 공포를 삼켰다.

   

머릿속에서 혼자만 돌려보던 귀갓길 풍경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된 건, 희곡을 쓰며 ‘유나’라는 인물을 만들면서였다. ‘유나’는 나의 공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유나’가 단발머리인 이유도 그래서였다. 긴 머리는 도망갈 때 붙잡히기 쉽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게 무서워서. 연습실에서 이 이야기들을 꺼냈을 때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당황한 얼굴들이 보였다. “주인공보다 네가 더 괴짜다.”라고 말하며 웃음으로 정적을 넘기려는 얼굴도.

    

이 공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소 극단적인 상상을 하게 된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고등학생 시절 일어났던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을 말했다. 그때 내가 역 앞에서 보았던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과 쉬는 시간에 친구에게 들었던 ‘경찰이 수색을 위해 동네 저수지 물을 모두 뺐다’는 이야기를. 나를 둘러싼 얼굴들은 이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범인도 잡혔고, 모두 지난 일인 걸요.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얼굴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밤마다 시뮬레이션하던 귀갓길 풍경을 더는 그리지 않게 되기도 했고. 그때는 긴 악몽이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잊을만하면 뉴스에서, 드라마에서, SNS에서 위협받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연습실에서, 나의 공포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말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정말 그것 때문만이었나?


기억이 남아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가 마주한 어떤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밤, 여성들에게 있었던 이야기. 어느 날은 괴담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영화가 되고 또 다른 날은 뉴스 기사가 되었다가 어떤 날은 누군가의 경험담이 되기도 했던 이야기들. 그래, 그 공포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었어. 그리고 내가 마주한 이야기들은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내 몸 안을 뱅뱅 돌고 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모르는 곳에 갈 때 혼자 택시를 타는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내 말을 듣던 한 친구가 말했다. “기사들이 물어보면, 그냥 네비보고 말해주면 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네비에 다 나와.” 알아, 근데 그걸 말하는 게 그렇다고. “잠시만요, 하고 네비에 나온 거 보고 설명하면 된다니까?” 아 존나 그 이야기 하는 거 아니라고!


어떤 소설집의 제목처럼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었다. 네비 타령을 하던 친구는 아직도 나의 말을 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할 테다. 택시 기사의 한 마디에,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일상물이 공포물로 변하는 경험 또한 그는 전혀 모를 것이다. 내 몸을 뱅뱅 돌고 있는 이야기를 그는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공포를 멀찍이서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얼굴. 괴짜라며 당황해하는 얼굴. 웃음으로 나의 경험담을 소비하는 얼굴. 네가 소리치고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다고 화내는 얼굴.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들에 둘러싸여, 내 몸을 뱅뱅 도는 이야기 속 여자들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붙인다. 얼마나 여러 번 붙였다 떼었다 한 걸까. 이야기 속 여자들의 얼굴은 너덜너덜해져 까맣게 된 지 오래였다.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혐오, 협소한 존재의 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