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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Nov 29. 2021

이건 제 글이 아니에요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이번 가을, 공연을 하나 올리며 생각이 많아졌다. 이 생각과 저 생각 사이에 끼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이 고통은, 연습실을 방문한 나에게 연출가 A가 대사를 몇 개 수정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들은 말은 분명 “수정하고 싶다.”였지만, 이미 수정한 대사로 연습은 진행되고 있었다.

    

A연출가가 대사 수정을 요구하며 내 앞에 늘어놓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출가는 꼭 대사를 수정했으면 했고,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니 수정하고 싶지 않았다. 공연을 올리는 과정에서 이러한 갈등은 비일비재한데, 결론은 대부분 비슷하다. 답답해하면서 대본을 수정한다. 그리고 내가 상처 받는 부분도 늘 비슷하다. 의견을 먼저 물어봐 주면 덧나는 건가. 왜 먼저 바꿔놓고 통보하지. 동의할 수 없다는데, 왜 자꾸 자신의 입맛에 맞게 희곡을 바꾸려 하는 거지. 희곡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작가인 나인데.


공연 제작 과정에서 너덜너덜해진 대본만큼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상처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뤄지는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다. 내가 너무 날을 세워 반응한 것은 아닐까. 내가 괜한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닐까. 나 때문에 연습 분위기가 엉망이 된 것은 아닐까. 내가 연출을 비롯한 배우, 스텝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잘난 글도 아니면서…….


공연은 함께 만들어 가는 작업이라는 말이 있다. 매우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은 종종 극작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데뷔 후 두 번째 작품을 올렸을 때였다. 그때 함께 작업한 B연출가는 내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예쁘게 만들어 볼 테니 자기 말대로 수정해 달라’는 통보가 이어졌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원안을 내 이름으로 올리고 각색해서 사용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팀인데 혼자 빠지는 거냐며 B연출가는 화를 냈다.


삐걱거리는 작업은 이어졌다. 연습은 시작됐고, 나는 계획대로 수정고 작업에 들어갔다. 수정고가 완성되었을 무렵 B연출가는 자기에게만 먼저 대본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단톡방에 대본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연출가로서 먼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러기로 했다. 수정고를 확인한 연출가는 전화를 걸어와 자기가 생각한 그림과 너무 달라져서 그냥 초고로 가는 게 낫겠다고 통보했다. 초고와 수정고는 전제 구성에서 봤을 때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수정고에서 코미디 요소가 좀 더 짙어졌을 뿐.(애초에 이 희곡의 장르는 코미디였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미리 공유한 수정 계획과 어긋난 것도 없었다.


수정고로 가냐 초고로 가냐를 가지고 우리는 다시 설전을 벌였고, 그는 이번에도 자기가 알아서 잘 선택하겠다며 통보를 해왔다. 나도 물러나지 않았다. 전화로 화를 냈다가, 장문의 편지를 써가며 논리적으로 나의 의견을 피력했다. 연출가는 내 의견대로 수정고로 가겠다고 답했다. 이는 거짓말이었다. 내가 없는 연습실에서 그는 배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가 배제하고, 우리는 그냥 초고로 갑니다.”


공연은 함께 만들어 가는 작업이 맞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목소리만 삭제된다면, 이것을 진정 함께 만드는 작업이라 말할 수 있을까? B연출가는 초고가 나왔을 시점부터 일일이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어 대본 별로이지 않냐며 여론을 조성해왔다고 한다. 공연을 만드는 과정은, 연습실이라는 공간은 가끔씩 이렇게 극작가의 존재를 지워버리곤 한다. 연습실에 갈 때면 늘 가슴이 떨린다. 그것은 설렘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언제 어떻게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적진으로 향하는 공포의 감정이기도 하다.


“희곡을 공연팀에게 넘기고 나면, 시집간 딸처럼 생각해야 해.” 연출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연습 과정에서 희곡이 함부로 수정되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에게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시집간 딸이라는 말은 뭔가? 도대체 시집간 딸은 어떤 존재인가? 공연팀이 원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건가? 시집간 딸이라면 그래도 되는 건가? 더욱이 충격이었던 점은, 이 말이 극작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예비(후배) 극작가에게 극작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B연출가가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극작가는 대본을 넘기고 나면, 연출가(공연팀)에게 모든 걸 맡기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라는 연극계의 분위가 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먹고 자라, 그럴 순 없다고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도 스스로를 검열하고 불안해하는 내가 있다.

 

신인 극작가를 인터뷰한 글을 읽다 보면 자주 발견되는 질문이 있다. “희곡을 공연화 할 때, 자신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을 선호하시나요? 아니면 공연팀에 의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선호하시나요?” 유연한 작가를 원하고, 텍스트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종종 잊는 환경에서 이러한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연을 올릴 때마다 경험하는 소외의 감정은 조그만 것에도 과민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 나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다시 또 공연을 올리며 상처 받고 잔뜩 가시를 세우기를 반복하는 나는 저 질문에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속에서 나는 점점 미쳐갈 뿐이다.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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