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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Oct 31. 2018

집밥은 어째서 든든할까?

"엄마, 고마워. 난 이제 자유야."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당신이 옳다>는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자 치유자인 정혜신 박사가 쓰고, 남편인 이명수 심리기획자가 영감을 준 '적정 심리학' 설명서이다. 그녀는 30년 동안 고통의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온몸으로 그것을 감당하며 전진해야 하는 최전방 치유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상처 입은 가까운 사람을 연민하고 보호해 주려는 사람이 이 책을 보면 좋겠다고 말한다.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스러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라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예상치 않게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질문은 심장 충격기 같은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간단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은 초등학생이 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진 성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실화처럼 심리적 CPR 또한 마찬가지다. 심리적 CPR은 꼭 배워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살리게 된다. (p.58)


두 번, 그녀에게 CPR을 받았다. 한 번은 성추행 피해로 마음을 다친 후 박사 과정을 관둘 힘이 필요했을 때, 또 한 번은 몸이 폐업 선언을 한 후 퇴사를 단행할 힘이 필요했을 때였다. 비록 '내 마음 보고서'라는 심리 분석 프로그램을 통한 간접적 방식이었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있던 심장에 일순간 생기가 돌고 비상 탈출을 위한 힘이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만 몰래,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



모두가, 나조차 나를 비난했던 순간에 유일하게 나를 '공감'해주었던. '네가 이렇게나 힘들구나, 죽고 싶을 만큼 힘들구나'라는 한 마디 말이 나를 살렸다.



마음의 허기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집밥 같은 심리학을 모두가 알게 되길 바라며 글을 쓴다. 아, 책을 네다섯 번 읽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기서 '스스로'라는 표현은 '혼자서'라기 보다는 '공동체 내에서 우리 스스로'에 뜻이 가깝다. 그래서 몹시 슬퍼지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일년 363일 24시간 함께 있는, 무엇보다 연인이고 같은 일을 하는 도반이었으며 서로에게 스승이었고 특별하게는 전우인 남편이 있어 그런 걸까.


강남이라는 거대한 부잣집에서 일하다 밤이면 원룸이라는 문간방에 틀어박혀 그림자처럼 살아야 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연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중략) 그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며 존재가 거의 희미해진 삶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소리 안 나는 총에 맞은 사람처럼 조용히 허물어지는 일이다. 청년 고독사가 그 극단적 결과다. (pp.56-57)


청년 고독사를 문득 실감하는 내게는 셀프 치유법이 절실했기에 띠지에 적힌 '스스로'라는 말이 뛸듯이 반가웠는데. 속은 기분이었다. 치유도 짝이 있어야 할 수 있는걸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이 기술을 익혀 사람을 곁에 모으거나, 우연히 이러한 사람을 만나길 기대하며 떠돌거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애써 권해야 하는걸까. 어쩐지 쓸쓸했고 조금은 원망스러웠지만 그렇다해도 여전히 고맙다. 무명의 진로 코치인 내가 학부모에게


계속 바꾼다는 건 흔히 생각하듯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고민 속에는 '왜 나는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하는걸까?'라는 생각도 늘 함께 들어 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당사자는 그런 자신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자책하며 생각한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다고 하지는 마라" 같은 강요는 아이의 퇴로를 막고 철창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p.232)


라고 말하는 것보다 유명한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그녀의 말을 빌린다면 훨씬 더 설득이 쉬울테니까. 게다가 나 개인은 비폭력대화를 기반으로 한 코칭을 실시하며 효율적이고 확실한 효과를 보고 있었지만, 학위도 논문도 저서도 아직 없기에 공신력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결이 비슷한 방식을 임상적으로 증명해주는 이 책의 등장이 너무나 반갑고, 여기까지 꿋꿋하게 와준 "다정한 전사"에게 한없이 고맙다.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집밥은 어째서 든든할까?


1. 집밥은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국경 수비대가 한 명도 없는 나라 같다. (p.180)


이 문장 앞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너졌다. 한숨 같은 바람이 지나갔을 뿐인데 가장 약한 부분에서부터 우르르 허물어졌다. 나에겐 국경 수비대가 없다는 아픈 진실. 내 나라는 늘 엄마 나라의 속국이었고, 스무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날 벼락처럼 내리친 충격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쩍쩍 갈라진 땅에서는 젖과 꿀이 흘러나왔다. 내가 끊임없이 사랑을 생산하는 사람이란 것,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그걸 모두 바쳐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주인 없이 넘치는 사랑은 쓸모가 없었다. 국경 수비대는 자원봉사자 혹은 도둑이 되어 그것을 아무나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왕따와 학교 폭력, 한 푼 손벌릴 곳도 없는 경제적 자립, 성폭력, 타지에서의 직장 생활..을 겪으며 따라온 거식증과 폭식증, 우울증의 특효약은 그 젖과 꿀이었는데도 나에게 그것을 줄 생각을 못했다.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를 더 압축해서 말하면 '사랑에 대한 욕구'다. (중략) 사랑 욕구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피폐해지지 않고 살 수 있다. 차의 성능이 좋아져도 휘발유나 전기 등의 동력 없이는 1밀리미터도 움직일 수가 없다. 몸이 산소와 음식이라는 동력원으로 움직이듯 마음은 사랑 욕구가 채워져야 움직인다. (p.222)


집밥을 너무 오랫동안 먹지 못하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가 된다. 감정이 메마르고 무엇도 느끼지 못한 채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지만 그건 사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었던지 그 와중에도 살아보겠다고 멘토, 은사, 심리상담사, 친구, 친구의 엄마까지 찾아가 보았더랬다.


작은 고민부터 시작해 곧 죽을 듯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부모나 교사들 때로 상담가들도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날린다. 친구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도 책을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고통 속에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충조평판의 잣대를 들이밀며 다그친다. 내가 너에게, 나도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충조평판을 빼면 달리 할 말이 없어서다. 충조평판이 도움이 될 거라 믿어서라기보다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일 때가 더 많다. (p.107)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p.295)


그래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가면처럼 덮어쓴 웃는 얼굴로 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던 나에게 첫 온기를 준 사람들도 그곳에서 만났다. 반찬을 배달하고 돌아가는 내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할머니의 눈빛, 쭈뼛거리면서도 곁에서 맴돌던 청소년들의 말소리, 와락 안겨 떨어질 줄 모르던 아기들의 작은 손에 구원 받았다.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내 존재도 의미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목구멍 뜨겁게 차올라왔다.


영영 주목받지 못할 존재에게 살아보라는 말은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고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생존이 불가능하다. 실력이나 재능이 뛰어나지 않고 비상한 머리, 출중한 외모가 없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이해관계 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물론 가족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p.93)


그 기세를 몰아 '공감'을 나누는 독서(비블리오테라피) 모임을 만들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잠시 쉬다가 다시 날아갈 수 있는 곳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이후 자연스럽게 코칭, 비폭력대화, 그림책 심리지도사 같은 공부도 하게 되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배워야 아는 고통, 배워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래야 최소한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p.125)



이 책의 후반부에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꿀팁들도 잔뜩 있다.



아무리 내가 겪은 고통이 깊고 넓으며 진심으로 충만해 있다 해도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는 적절한 기술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주로 만나는 어린 학생들은 이미 그 기술을 알고 있다는거다. 최근에는 거의 매일을 아이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가는데 숨쉬듯 자연스럽게 공감과 사랑을 나누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놀랍고 행복하다. 판단도 충고도 없이 그저 서로의 생각과 느낌, 욕구가 어우러진 역동의 세계.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p.143)


어른이 되어가는 어느 시점에서 그걸 잊어버리지 않길, 잊혔더라도 회복되길. 우리의 기억에 이 순간이 단단히 새겨지길 바라며 아이들과 눈을 맞출 때 그런 바람을 기도처럼 읊는다.



2. 집밥은 사랑과 정성으로 차려졌기 때문이다.


과거 겪었던 일들에 대해 입 다물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도 드러내기 겁나는 이유가 있다.


그의 질문에는 그가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과는 별개로 치유와 관련된 우리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심각한 가정 폭력을 겪고 자란 사람 일반'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전문적인 방법'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친구를 유일하고도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기보다 '심한 가정 폭력을 당한 사람 일반'의 범주에 넣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p.151)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항암제를 처방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정성스럽게 차려진 집밥 한 그릇과 잠들 때까지 쓰다듬어주는 손길이면 나을 수 있는 배앓이인데도, 불치의 암덩어리처럼 취급될 때가 가장 괴롭고 절망스러웠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pp.45-46)


공감의 힘과 사람의 자생력을 믿는다. 한 사람이 겪은 일이 그에게 감히 꼬리표를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불안과 공포가 왜 우울증인가. 은퇴 후의 무력감과 짜증, 피해 의식 등이 어떻게 우울증인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 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은 비정하고 무책임하다.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이다. 누구도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가파른 언덕에서, 어떤 태도로 서로를 대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허둥지둥 전문가를 찾는 일보다 먼저여야 우리의 삶은 편안할 수 있다. (p.91)


열린 귀와 가슴이 곁에 있다면 왠만한 상처는 그 스스로 낫기 시작한다는 걸 굳게 믿는다.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 '너는 옳다'라고 지지해 주면 상대가 오판하지 않을까. 자만심에 빠져 결국 잘못되지 않을까. 쓴 약처럼 따끔한 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게 어른다운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니다. 그건 사람을 어리석고 표피적인 존재로만 상정하는 틀에 박힌 생각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오만한 시선이다.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 자체를 메시지의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제를 더 근원적인 메세지로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너는 옳다'고 해주면 A는 지금 집 밖을 배회하는 내가 참 잘하고 있구나라고 믿는 게 아니라 찌질하게 구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안심하게 된다. (p.50)


독한 항생제보다 따뜻한 차와 휴식이 낫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안다. 피곤하고 지쳐서 효율성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도 안다. 사랑은 무엇인가, 정성은 무엇인가. 그것으로 차려진 집밥은 무엇인가. 함께 고민하고 자기 주변에서부터 실천하다 보면 조금씩 더 살만한 세상이 되어갈 것이다.





3. 집밥은 스스로 지어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지금 당신의 말이 느려지고 버벅대는 게 느껴지느냐고 물었다. 진짜 자기 말이 나와서 그런 거라고 얘기해 줬다. 가성이 아니라 자기 육성이 처음 나와서 어색해서 그러는 거라고. (p.146)


이 글은 거의 한 달 동안 작성했다. 남의 마음 들여다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데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내 마음 말하는 일은 이렇게나 어색하고 어려웠다.


그렇게 자신과 자기 상황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때까지 묻고 공감하고 또 묻고 다시 공감해 주는 일을 반복해 주는 것이 옆에 있는 공감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을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곁에 함께 있으면서 주저앉으려 하면 함께 주저앉아 있어주고, 그 과정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등 엉뚱하게 해석하면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다시 묻고 들어주고 또 그 마음을 공감해 주면서 함께 가는 사람이 공감자다. (p.152)


눈 가린 채 밤길을 더듬어가듯, 나와 내 마음과 이 책은 함께 걸었다.


어떤 면에서 트라우마 현장 같은 극단적인 고통의 현장에 있는 공감자들은 피해자 보호보다 자기 보호에 사력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기 보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끝내 타인을 공감하는 일을 감당한다. (p.188)


국경 수비대도 '퍼주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 일이 아니다. 내 상처가 공감받는 것에 예민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공감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와 너, 양방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느 일방의 공감도 불가능한 것이 공감의 오묘한 팩트다. 그래서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며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p.187)


이제 그 젖과 꿀을 나에게 먼저 달라. 내 배부터 채우고 내 마음부터 치유한 후에 남는 부분은 아낌 없이 나눌테니. 내 나라를 재정비하고 나에게 다시 왕의 권한과 권리와 의무를 돌려달라. 이웃나라 왕과의 교류는 그 이후에 시작될테니.


사람은 옳기도 하지만 잘못 판단하고 행동할 때도 있는데 어떻게 늘 옳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당신이 옳다'는 말은 그런 현실적 수준의 잘잘못이 아닌 더 근원적 차원에서의 명제다. (중략)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p.49)


과거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더이상 부정하거나 숨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을 이유가 분명 있었을거라 말하며 나를 안심시킬 것이다. 그런 과거로 이루어진 지금의 내 모습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인 BTS(방탄소년단) 노랫 속 가사처럼,


"니 삶 속의 굵은 나이테

그 또한 너의 일부, 너이기에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자

버리기엔 우리 인생은 길어

미로 속에선 날 믿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는 거야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

(I’m learning how to love myself)

빠짐없이 남김없이 모두 다 나"

(Answer : Love Myself 중에서)


가장 근사하고 든든한 집밥을 차려 나를 먹일 것이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기만 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어서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말이 끝나곤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p.160)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필요하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이 필요하다. 온전히 내 편인 한 사람이 필요하다. 엎드려 울음을 터뜨릴 무릎과 힘껏 부딪치고 때릴 가슴과 기대어 잠시 쉴 등판이 필요하다. 작가님 부부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거란 희망을 집밥처럼 지어먹어야 할 때 꺼내 보아야 할 책이 이렇게 내게로 왔다.





이렇게나 모여든다, 우리가. 그 한 사람의 곁에. (세바시 강연. 출처-유투브 세바시)



목소리만으로 찡한 강연을 유투브 세바시 채널에서 들을 수 있다. (두 분의 강의 모두 열린번역 한글자막을 입혔는데 작업 하면서 수십 번 듣는 내내 위로받았고 행복했다.)



당신이 옳다 | 정혜신 치유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https://youtu.be/GmUgwL25j0o



내 마음이 지옥일 때 | 이명수 심리기획자

https://youtu.be/r19P3I075pE






(책 본문은 회색으로, 제 생각은 검은색으로 표기하였습니다.)












(C) 2018. 권윤경.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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