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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Oct 24. 2019

불꽃놀이

"화려했던 너와 나의 지난 시간이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우물쭈물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


근데 그 꼴을 보면서도 나는 아직 네가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한 번이라도 더 널 이해하려고,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주변에서 아무리 그놈이 나쁜 놈이다 그놈이 범인이다 그놈이 원흉이다 그놈을 걸러라 돌림 노래를 불러도 호연이 그럴 애 아니라고 편들기 바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호연이를 소개해주고, 부모님한테 인사도 시켜드리고, 호연이 부모님도 만나 뵙고, 호연이 주변 친구들과 여러 차례 만나 친분을 다졌다. 핸드폰 사진첩과 sns에는 서로의 흔적이 잔뜩 묻었고 내 카페와 집에도 호연이의 물건(이를테면 칫솔이라던가 신발이라던가 USB 충전 케이블이라던가)들로 가득했다. 달콤하게 상냥하게 말해주는 호연이가 좋았고 내 기준에 조금 부족하다 한들 노력하는 모습이 예뻤고, 그런 사랑받는 순간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으니까.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일들의 시작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소한 트집이었다. 같이 술 한잔하려고 술집에 갔을 때의 일이었는데, 술을 시켜두고 화장실을 가는 길을 웬 남자가 막고 있길래 말을 걸어 비켜달라고 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술집에 꽤나 사람이 많았으니 뭐 길 좀 막고 있을 수도 있지. 선 채로 친구분과 수다를 떨고 계시던 그 남자분은 놀란 표정으로 죄송하다며 후다닥 길을 비켜 주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장실에 다녀온 내게 호연이는 대체 왜 다른 남자와 말을 섞었냐며 화를 냈다. 술은 시켜만 놓고 마시지 않았으니 놀랍게도 놀랍게도 우리 둘은 모두 맨정신이었고 호연이가 약간 집착하는 게 있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거부감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지금 무슨 표정 짓고 있을지 안다. 그 표정이 당시 내 표정이었으니까. 그럼 길 막고 있는 사람한테 비켜달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고, 그렇게 싫으면 네가 같이 가주지 그랬냐고 따졌더니 꼭 말을 하지 않아도 비켜줄 수 있지 않냐는 대답을 해서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지금 무슨 표정 짓고 있을지 안다. 그 표정이 당시 내 표정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내게 상냥하게 말해주고 웃어주던 그 호연이랑 이 호연이가 같은 호연인가 싶어서 그날의 나는 정말 많이 화가 났지만 그만큼 정말 많이 무섭기도 했다.


그때 그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혹은 화장실을 조금 나중에 가거나 미리 가거나 했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후 호연이의 행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고, 그런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조금 늦춰질 수는 있었겠지만 어쨌든 호연이는 또 다른 낯선 모습으로 내 뒤통수를 세게 쳤을 것이다. 뒤통수와 마음이 아픈, 듣는 사람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런 에피소드들은 참 많지만 이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분들의 평안을 위해 이런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가장 순한 맛 에피소드다.


그렇다고 마냥 못되게만 굴진 않았다. 지금은 좀 괜찮지만 그때의 나는 카페 개업 후 정신없었던 것도 있고, 전 남친 때문에 멘탈이 걸레짝이 된 것도 있고 원래도 튼튼한 몸은 아니었기도 해서 몸이 많이 안 좋았던 시기였다. 호연이랑 만날 때도 새벽에 갑자기 열이 올라 응급실 신세를 지는 것은 물론이요, 주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해 (정말 많이 아픈)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호연이는 우리 집까지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와 나를 응급실에 데려가기도, 업무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퇴근해서 입원한 내 곁을 지키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출근하기도 했다.


잠깐 잘 해주고 지쳐 그만둘 거였으면 아예 시작을 말지. 잘 해주지도 않았으면 그리워할 좋은 기억도 없었을 테니 지금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사실 연애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것은 굉장히 큰 리스크다. 애초에 이별을 생각하고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헤어지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두 사람만의 이별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도 싸워야 했지만 이걸 어떻게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에게 전해야 하지 하는 고민에도 휩싸여 마음이 굉장히 어지러웠다.


여러 번 만남과 이별을 하다 보면 무뎌진다던데 나는 아직 이 날 이 나이까지도 이별이 힘들다. 지난 이별들에 대해서는 일에 몰두한다든지, 친구들과 연일 술 파티를 벌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남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버텨 왔는데, 이번에는 조금 방법을 달리해서 카페를 며칠 정도 닫고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이 여행의 정체를 밝히자면, 호연이랑 같이 가기로 했던 우리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비행기랑 호텔까지 다 예약해 둔 건데 헤어져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차에 돈이 아깝기도 했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바깥공기를 좀 마시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어쩌면, 아주 어쩌면 공항에서 한 번 더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마음도 있고 해서 캐리어를 싸게 되었다.


...그래 지금 무슨 표정 짓고 있을지 안다. 서른 하고도 두 해 씩이나 살아왔고 삶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능숙해졌지만 적어도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아직도 '흑우'다. 음머어어어어



어쩌다 보니 정말 혼자 와버렸다. 친구들이랑은 유럽 여행도 가고 여기저기 잘도 다녔지만, 참고로 지금까지 살면서 나 혼자 가장 멀리 가 본 곳은 제주도다.(심지어 제주도에 친한 친구가 살고 있다)


그런 내가 혼자 싱가포르를 간다고 하니 주변 친구들은 다들 물가에 자식 내놓은 것 마냥 내게 '도착하면 꼭 연락해야 해', '모르는 사람 쫓아가면 안 된다! 아 잘생기면 고민 좀 해보고' 따위의 걱정 아닌 걱정들을 해 주었다. 그런 걱정들에 대해 투덜거리긴 했지만 사실은 진짜로 걱정 많이 했다.


게이트를 잘 못 찾으면 어쩌지, 비행기 좌석이 많이 좁으면 어쩌지, 옆에 덩치 큰 아저씨가 타서 좁게 가면 어쩌지, 비행기가 많이 흔들리면 어쩌지, 도착했는데 캐리어가 인천공항에서 안 왔다고 하면 어쩌지 등등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절대 하지 않을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 무탈하게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고, 흘러 흘러 오다 보니 호텔에 무사히 도착해 얼리체크인까지 마치고 호텔 침대에 파묻히듯이 누웠다. 청소가 끝난 호텔방 특유의 향기와 함께 바깥의 이국적인 풍경이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날 다독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걱정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걱정하면서 오느라 슬프고 우울할 틈도 없었다는 게 문득 느껴져서 허탈하게 웃었다. 어쨌든 도착도 잘 했고, 여기의 나는 한국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선 거리로 나섰다. 애초에 그곳으로부터 떠나오기 위한 여행이었으니까. 첫날은 그렇게 여기저기 겁도 없이 잘 쏘다니고 잘 먹고 들어와서 푹 잠든 것 같다.


그로부터 어찌어찌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너무나 즐거운 일이 많았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했다. 그런 가운데 내 시간의 흐름은 어느새 한국의 일상 속에서 벗어나 여행 속에 완벽히 적응했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나라의 다양한 매력에 흠뻑 빠져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이 쉬운 걸 대체 왜 그동안 못 했던 걸까?


마지막 날은 별다른 일정 없이 호텔 수영장의 선베드에서 책을 읽고 노래를 들으며 보냈다. 나름 규모 있는 호텔인데 그동안 돌아다닌다고 씻고 자는 것 외에는 이 호텔을 이용하지 못해서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나른한 선베드에 누워 둘러보는 호텔의 오후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어느덧 해가 졌고, 호텔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선베드로 기어 들어왔다. 한 친구가 싱가포르에 가면 꼭 슬링을 마셔보라고 했지만, 역시 나는 맥주파라 수영장 바에서도 타이거 맥주만 주구장창 주문해 마셨다. 그렇게 저녁 공기를 즐기며 눈을 감고 노래를 듣던 찰나, 저만치서 펑펑펑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해변가 쪽이었다. 하늘 높이 올라간 불꽃들이 터진 뒤 사그라드는 모습이 보였다. 여행 오기 전 나름 준비한다고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매일 저녁 호텔 근처 해변가에서 공연 같은 걸 한다는 블로그 게시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지금이라도 해변으로 걸어가 볼까 했지만 난 이미 선베드와 하나가 된 몸. 그냥 누운 채로 불꽃놀이를 감상하기로 했다.


마지막 날이라고 싱가포르의 나와 한국의 내가 바톤 터치를 해서일까, 그냥 밤이었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둔 노래도 감성을 자극하는 곡들만 나와서 그런 걸까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방금까지 불꽃놀이 보면서 헤헤거리면서 맥주 마셨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눈물에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불꽃은 퍽 예쁘게 밤하늘로 퍼져 갔다. 오히려 눈물로 인해 빛이 퍼져 보인 덕에 불꽃은 조금 전보다 더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하늘을 수놓은 뒤 사라졌다.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면 이런 예쁜 모습을 볼 수 없었겠지 라는 생각을 한 걸 보니 아무래도 나는 여행을 오기 전보다 굉장히 많이 나아진 것이 분명하다.


불꽃은 한동안 내 앞에서 화려하게 펑펑 터졌다. 눈물 때문에 흔들리는 저 불빛들이 마치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내 마지막으로 보이는 불꽃이 유난히 힘차고 높이 쏘아 올려졌고, 여느 불꽃들과 다름없이 금방 사라졌다. 밤하늘이 다시 깜깜해진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나는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후련해지는 듯한 기분도 함께 들었다.


그래.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안다.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나는 괜찮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다.


아름답지만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불꽃처럼 우리는 살면서 마주하는 많은 것들과 이별하게 된다. 지금의 나처럼 딱히 남녀관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한때는 소중하게 여겼던 그것들과 이별한다고 해도 우리는 어쨌든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언젠가 모든 것들은 내 곁을 떠난다고, 마지막에는 혼자 남게 된다고,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남김없이 불꽃을 쏘아 올려야 할 것이다. 온통 쏘아 올려진 불꽃으로 뒤덮인 나의 하늘이 언제까지나 아름답게 빛나도록.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랫동안 강바닥을 계속해서 휩쓰는 고통보다는,

손에 든 한 줌의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보다 행복해졌으면 하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간의 흐름은 멈출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갑니다.


하나의 여행이 끝나고 또다시 다음 여행이 시작된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어느샌가 가버리고 마는 사람, 스쳐 지나갈 뿐인 사람.

나는 인사를 나누며 점점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살다 보면 늘 행복할 수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마냥 뒤돌아보고 살 수 없기에 배에 힘을 꽉 주고

똑바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슬프고 힘들어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을 때가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언제든 네 삶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힘든 일을 겪게 된다면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혹시라도 지금 그렇다면

늦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언제든 주변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힘든 나날들을 이겨내고 나면 아마 우리의 하늘은

이전보다 더더욱 아름다운 불꽃들로 수놓아져 있을 것이다.


분명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에 수록된 단편 '달빛 그림자' 의 일부를 차용했습니다.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내 친구가 하루라도 빨리 씩씩하게 다 털어내고 일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랄라스윗 - 불꽃놀이]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

검은 하늘 오색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는

오늘 밤 별보다 아름다운 불꽃


영원할 듯이 반짝거리며 뜨겁게 타오르다가  

속절없이 어느샌가 사라져버리는

불꽃 하나 우리 기억 하나


타오른다 불꽃이 타오른다 검은 하늘 위

우리 추억이 터져 오른다

화려했던 너와 나의 지난 시간이

짙은 어둠 속으로


굉음을 내며 높이 떠올라

검은 하늘에 꽃이 피면

메케한 연기를 남기고 흔적 없이 사라져

기쁨 모두 상처들 모두


타오른다 불꽃이 타오른다 검은 하늘 위

우리 추억이 터져 오른다  

화려했던 너와 나의 지난 시간이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지워진다 뿌옇게 흐려진다 작열하는

불꽃 아스라이 스러져간다

화려했던 너와 나의 지난 시간들처럼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너를 본다 마지막으로 너를

가장 예뻤던 기억 하나만 남겨두고서

불꽃들 다 삼킨 밤하늘 아침을 토해내면

그땐 정말 너를 보낼게

안녕

랄라스윗(lalasweet) '계절의 空'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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