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내 겨울을 이제 준비해야 해. 니가 너무 많은 내 겨울을"
"세탁이요!"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깨 문을 열자 색색깔의 코트들이 다소 쉰 목소리로 내게 말하며 현관으로 들이닥쳤다. 아직 40% 정도 꿈속에 있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린 뒤 드라이클리닝이 끝난 코트들을 받아 들었다. 나는 성실히 수면에 임해 밤이 지나는 사이 이렇게나 누추해졌는데 너희는 뽀송해져서 돌아왔구나. 어서 와 내 새끼들. 혹시나 개기름이라도 묻을까 최대한 피부와의 접촉을 피하게끔 아이들을 옷장 속에 잘 걸어두고 아직 코에 맴도는 드라이클리닝 특유의 묘한 향기를 느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만 가는, 그렇지만 몸은 움직이기 싫은, 한껏 해이해진 몸가짐 마음가짐을 몇 시간쯤 더 유지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반 박자 늦은 아침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오늘은 유달리 고요하게 느껴졌다. 왜냐면 오늘은 주말도 공휴일도 아닌, 직장인이 평일 중 가장 높은 퇴사 욕구를 느낀다는 수요일이기 때문이다. 월요일 화요일 일하고 수요일 하루 쉰 뒤 다시 재충전을 완료해 목요일 금요일 일하고 주말을 쉬는 주 4일 근무제를 언제나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 시대의 흐름은 내 목소리를 듣고 있진 않은 것 같다.
내 말을 들은 우리 부팀장님은 주 5일이 정착된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인간의 욕심이 참으로 간사하고 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하셨지만, 지난번 회식 때 '씨발 김실장 개새끼 존나 좆같네 퇴사하고 싶어'라고 정확히 26번 말씀하신 것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그 격정적인 주장에 온 마음으로 공감하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주 4일 근무제 동의하시잖아요? 업무 압박은 둘째 치고서라도 김실장을 한 번 덜 볼 수 있잖아요. 김실장 개새끼.
아무튼...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연차를 썼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곧 연말인데 아직 내 연차는 무려 열흘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연가보상비를 주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고 내년부터는 회사 차원에서 연차를 모두 소모할 것을 권유한다고, 따로 돈은 안 준다고 하는데 그럼 연차 쓸 틈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언제 연차를 쓰냐? 뭐... 그건 내년의 나와 우리 부팀장님, 팀장님, 다른 팀원들이 고민할 일이겠지? 오늘 휴가 중인 나는 그런 머리 아픈 생각은 차단하고 좀 더 해이해져 있으렵니다.
코트 한 무더기를 초반에 등장시켜서... 나 뭐 옷이나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옷을 그렇게 많이 사는 편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사는 의류는 운동복뿐이었다. 겨울 외투는 두 벌 이상은 과하다고 생각했고, 바지도 종류별로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을이를 만나기 전 까지는.
사귀기로 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카페에서 라떼를 홀짝이던 가을이가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오빠. 나 오빠한테 할 말 있어."
"엥 뭔데?"
"아니 내가 그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
여기까지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뭔가 안 맞았던 게 있던 걸까? 내가 눈치 못 챈 뭔가가 있던 걸까? 아까 만나기 전에 카톡 답장 10분 늦었는데 요 며칠 말 못 하고 잠든 것도 있는데 그런 게 걸렸던 걸까? 한 달의 벽을 못 넘고 이렇게 끝나는건가? 시간을 갖는건가? 시발 뭐지 시발 뭐지 시발 뭐지 하고 그 짧은 시간 내가 동동동동 내적 발구름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가을이는 말을 이어갔다.
"오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어?"
"어?"
"운동도 열심히 해서 옷걸이도 예쁘면서 왜 이리 자원 낭비를 하시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을 했던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어려울 수 있는 얘기 단도직입적으로 하면서도 혹여나 내 기분이 상했을까 봐 좋은 말도 곁들여서 이야기해준 마음이 예쁘기도 해서 '어허헣허헣' 같은 바보 소리를 내면서 웃었었다.
그래서 가을이를 만나는 시간 동안 아까 이야기했던 코트 6형제를 포함, 이것저것 옷을 많이도 샀던 것 같다. 한 번은 코트를 입고 안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으려고 했는데 뭔가 부스럭대는 게 내 손을 잡았다. 뭔가 하고 꺼내보니 쪽지 모양으로 예쁘게 접은 가을이의 편지였다.
'보는 즉시 가을이에게 카톡해서 피자에 소주 한잔 걸치자고 유혹하시오^.~♡' 라고 적힌 귀여운 쪽지를 본 나는 원래 약속이었던 고등학교 동창 모임 멤버들이 있는 단체 카톡방에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못 가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가을이에게 전화를 했다. 반쯤 졸고 있었는지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가을이는 '피자에 소주 한 잔 똑딱?'이라는 내 말에 '전화 말고 카톡 하라니깐...' 이라며 '어허헣허헣' 같은 내 바보 웃음소리를 제법 비슷하게 흉내 냈다.
그런 귀여운 쪽지는 내 코트 안주머니, 바지 주머니, 가방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나 역시 가을이 몰래 이곳저곳에 쪽지를 넣어두곤 했다. 처음 우리 주변에서 오고 가던 쪽지들은 점차 스케일이 커져 자주 가던 동네 카페, 지하철 물품보관함까지 진출했고, 쪽지가 요청하는 요구사항 역시 굉장히 다이나믹해졌다.
그러지 말 걸. 우리 주변 이곳저곳 혹시라도 빠진 곳이 있을까 체크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지 말 걸. 어딜 가도 우리 추억이 있다며 온 세상이 너로 가득 찬 것 같다고 서로 눈 마주치고 배시시 웃지 말 걸.
문득 열어놓은 창문에서 부는 바람이 차가워 창문을 닫으려고 바깥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그래. 결국 나는 아직 숨겨진 너를 다 찾아내 버리지 않았다. 아니, 버릴 수 없었다. 저 구석에 던져두고 바쁘게 살고 있었지만 구석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계속 무시하고 살기엔 내가 너무 감성적이다.
옷장을 열어 보았어 몇 벌이 눈에 띄었어
조금 이른 것 같지만 입었어 거울 앞 내 모습은 그때 그 모습
싸늘해서 더 좋았어 골목은 해가 지려해
커피향이 그 때로 날 데려가 쇼윈도우 겨울옷을 바라보던 그 때로
그래 너였어 날 데리고 나온 건 내 주머니 속 내 손을 꼭 잡던
그 해 늦가을의 너 이젠 어디를 걷니 너의 발소리가 그리워
바람을 마셔보았어 가슴도 보고파해서
한결 나아진 가슴은 재촉해 힘든 밤이 오기 전에 돌아 가자고
그래 너였어 날 데리고 나온 건 내 주머니 속 내 손을 꼭 잡던
그 해 늦가을의 너 이젠 어디를 걷니 너의 발소리가 그리워
그래 너였어 가을을 가르쳐준 갈색 그리움이 끝이 없는 밤
다가올 내 겨울을 이제 준비해야 해 밤이 길고 긴 내 겨울을
니가 너무 많은 내 겨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