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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Nov 13. 2017

Haven't had enough

"난 한번 더 예전으로 돌아가서 시작하고 싶어."

"저기요? 듣고 계세요?"


"네? 아... 네! 어제 좀 늦게 자서 멍하네요."


  떠밀리듯 나온 소개팅이었다. 소개팅을 안 한다고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는데, 단호한 나의 거절에도 굴하지 않은, '나 한 번만 살려주라ㅠㅠ' 라는 선배의 장장 3일에 걸친 노력 끝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뭐... 얼마나 대단한 약점을 잡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곤경에 빠진 선배가 잘 이겨내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마침 먹고 싶었던 티라미수 케이크도 있었고, 친구랑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나는 선배에게 소개팅을 하겠다는 카톡을 보냈다. 메시지 창 저 너머에서 뭔가 환호성 같은 게 들려왔는데 기분탓이겠지.


"... 그래서 그게 제일 좋았어요 저는."


"아...아! 네! 저도 알아요 그거!"


"네? 군대 안 가셨을 텐데..."


아... 딴 생각 그만하고 집중해야겠다. 선배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니까...


"아뇨 설마요. 동생이 있으니까 저도 들은 게 어느 정도 있어서요."


  웬수같은 동생이 생애 두 번째로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3년 전 회식 끝나고 만취한 나를 데리러 안양에서 강남까지 와줬던 것. 물론 그 대가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3년간 술 마시러 간다고 할 때마다 고통받고 있다.

  내가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앞자리도 이제 3으로 변했고 이쯤 되면 제법 사람 보는 눈이, 남자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눈으로 지난 2시간 20분 동안 살펴본 결과, 이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을 내가 잘 알겠다. 맛있는 거 사주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댔어.


  반쯤 농담이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사람과 연애를 해야 할 의무도, 이 남자와 이후에 몇 번 더 연애 등을 전제로 만나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3년 전 그렇게 헤어진 후로 '연애'의 달콤함 따위는 흘린 음료수 닦은 휴지 내버리듯 저 멀리 내던진 나였다. 그래서 내가 선배의 간곡한 부탁이든 뭐든지 간에 소개팅을 한다고 말했을 때 엄마도 동생 경식이도, 나 없으면 1초도 못 사는 내 친구 김나봉도 - 당연하지만 별명이다. - 한 번씩 더 '소개팅?'이라고 되물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광대뼈와 목소리 데시벨이 상승한 상태로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그녀들에게 나는 소개팅을 한다고 해서 그게 항상 연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설명했으나 아무래도 듣지 않는 것 같아 이내 그만두었다.


  남자는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게 많은건지 정말로 다 관심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사실 안 궁금해서 생각 안 해봤지만 -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말에 막힘이 없었고, 다소 무심한듯한 내 말에 한 번도 싫은 티 안 내고 센스있게 잘 받아쳐 줬다. 그래서인지 나도 어느새 좋았었던 여행지 이야기, 조금 전 먹었던 수제 티라미수 케익부터 해서 왜 단 거에 환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 내 이야기를 간만에 쉼 없이 쏟아낸 뒤 카페를 나섰고,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그래. 인정한다. 생각 없이 기대 없이 나간 자리였지만 의외로 너무 즐거웠던 시간이었다고.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아직도 무섭다. 아직도 3년 전의 그 날을 떠올리면 눈앞이 흐려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손이 덜덜 떨리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남자가 오늘 내게 보여준 모습처럼 정말 다정하고 유쾌한,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또 그런 일을 겪게 될까봐 무섭다.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 이런 속내를 완전히 다 아는 사람은 없기에 언제 다 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겠으나 있다 하더라도... 나도 모르기 때문에 대답해줄 수 없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 번의 만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 상태가 이렇기 때문에 아마 우린 잘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남자는 이후 몇 번 더 나와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나는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다른 남자들보다 다소 오래 만남을 시도했던 그 남자도 거듭되는 거절 끝에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퇴근하고 나봉이를 만나 치킨에 맥주 한잔하면서 어떻게 됐냐고 나봉이가 번 물어본 것 외에는 주변에서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흐릿해져 가는 듯했다.

  주말이다. 늘어지게 늦잠을 잔 뒤 눈을 뜨고 물을 한 컵 마신 다음 잠시 상쾌해한 후 다시 누워 이불에 몸을 돌돌 말아 이불 그 자체가 되어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던 중 엄마에게 등짝과 엉덩이를 3회가량 폭행당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 장 보러 가는 길에 짐꾼 1로써 강제 노역을 하게 되었다. 가녀린 딸내미 때릴 데가 어디 있냐는 나와 때린 손바닥이 더 아프다는 엄마 간의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승자 없는 공방전을 벌이면서도 내가 군말 없이(?) 엄마를 따라온 이유는 이른바 '엄카 찬스' 때문이다.


  나도 이제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엄마 아빠에게 적게나마 매달 용돈도 드리고 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마침 사고 싶던 색깔의 니트도 발견했고 그 니트가 작년에 나온 라인인데 재고가 남았었다고, 앞으로는 안 나올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사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노예 30년 차인 이 몸은 니트를 얻었다는 만족감에 휩싸여 양손의 장바구니 무게도 잊고 신난 걸음으로 총총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좋니?"


"그럼 당연하지! 새 옷 샀잖아. 게다가 이건 이제 더 안 나온단 말야."


"어이구 그러세요? 또 뭐 놓치고 못 산 건 없고? 모처럼 나왔으니까 엄마가 사줄게."


"음... 이 백화점?"


  왜 엄마한테 등짝을 맞으면서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몇 달 전 소개팅의 그 남자가 생각났다.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헛웃음을 뱉으며 나도 모르게 말했다.

"있어... 못 잡은 거."


"어이구 덤벙대고 걸어갈 때 내 그럴 줄 알았다. 살 때 샀어야지. 뭔데?"


"어... 아냐. 파는 거 아냐. 이젠 못 잡아."


"얘는... 실없는 소리 다 했으면 얼른 타! 집에 가자."


  엄마 말이 맞다. 살 때 샀어야지. 만날 수 있을 때 만났어야지.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이야기했어야지. 그게 남자건, 신상 니트건 갑작스레 마주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이도저도 아니게 되지 않도록 어느 쪽이든 선택했어야지. '얘도 마찬가지일 거다.',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 같은 변명거리를 대며 숨지 말았어야지.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카톡 메신저를 켜고 아직 지우지 않은 그 남자의 이름을 찾았다. 그래. 인정한다. 쿨한척 연락 안 하고 그를 떠나보냈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더 하고 싶었다고. 한 번 본 게 다지만 꽤 괜찮은 수준을 넘어서 정말 좋은 남자였다고.


  그렇게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이후로도 한동안 침대에서, 출&퇴근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가 지웠다가 걸었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고, 아직까지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



노래가 가지는 힘은 신비롭다.

나를 가장 행복했던 때로

나를 가장 슬펐던 때로

나를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참 신기하게도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널 만났던 처음으로 돌아간 듯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그때로.


[Marianas Trench - Haven't had enough]


※이 가사는 의역이 넘쳐나오니, 실제와 혼동하시면 매우 재미납니다.




있잖아. 생각해 봐. 내가 보기엔

너랑 나, 아마도 최선은 아닌 것 같아.


나가야 해. 어쨌든 그게 맞을 거야.

근데 나 아직도 널 원해.

널 갖고 놀려는 게 아니야.

만약 네가 지금 떠난다면

내가 널 쫓아다니게 될 거야.

넌 기억하고 곧 돌아오게 될 거야.


음... 난 한 번 더 예전으로 돌아가서 시작하고 싶어.

나 자신을 잃었던 그 언젠가, 그 이전으로 돌아가서


꽤 오랫동안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됐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제대로 된 끝을 보여줄 거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진짜야.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넌 충분하지 않았어.


꽤 오랫동안 막혀 있었지.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됐어.

더 이상 '마지막 장소'는 없어.

너의 이야기를 제대로 고쳐야 해.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진짜야.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넌 충분하지 않았어.


난 여전히 네가 필요해.

널 갖고 장난치는 게 아니야.

만약 날 원한다고 하면, 다시 돌아가서 널 만날꺼야.

속삭여줘. 너도 원한다는 걸 인정해야 해.

너도...너도 그러길 원하잖아.


음... 난 한 번 더 예전으로 돌아가서 시작하고 싶어.

나 자신을 잃었던 그 언젠가, 그 이전으로 돌아가서


꽤 오랫동안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됐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대로 된 끝을 보여줄거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진짜야.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넌 충분하지 않았어.


꽤 오랫동안 막혀 있었지.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됐어.

더 이상 '마지막 장소'는 없어.

너의 이야기를 제대로 고쳐야 해.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진짜야.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넌 안 그래?

넌 이러길 전혀 원하지 않아?

(있잖아. 생각해 봐. 내가 제안하는 거야.)

넌 그러고 싶지 않아?

넌 이러길 전혀 원하지 않아?

(있잖아. 생각해 봐. 내가 제안하는 거야.)


꽤 오랫동안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됐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제대로 된 끝을 보여줄 거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진짜야.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넌 충분하지 않았어.


꽤 오랫동안 막혀 있었지.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됐어.

더 이상 '마지막 장소'는 없어.

너의 이야기를 제대로 고쳐야 해.

넌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너도 그러고 싶지 않아?)

난 정말 이렇게 생각해

넌 충분하지 않았어

(너도 그러고 싶지 않냐구)

넌 충분하지 않았어.


있잖아. 생각해 봐. 내가 제안하는 건데

너랑 나. 아마도 최선일꺼야.




Testing, testing, I'm just suggesting

You and I might not be the best thing


Exit, exit, somehow I guessed it right, right

But I still want ya, want ya

Don't mean to taunt ya

If you leave now,

I'll come back and haunt ya

You'll remember, return to sender now, now


Well I just wish we could go back one more time and begin it

Back before I lost myself somewhere, somewhere in it.


I've been stuck now so long

We just got the start wrong

One more last try, Ima get the ending right

You can stop this, and I must insist

That you haven't had enough

You haven't had enough


Stuck now so long

We just got the start wrong

No more last place

You better get your story straight

You can't stop this, and I must insist

That you haven't had enough

You haven't had enough


I still need ya, need ya

dont mean to tease ya

If you want me,

I'll come back and meet ya

Whisper, whisper, You must admit you want it

You, you want it


Well I just wish we could go back one more time and begin it

Back before I lost myself somewhere, somewhere in it.


We've been stuck now so long

We just got the start wrong

One more last try, Ima get the ending right

You can stop this, and I must insist

That you haven't had enough

You haven't had enough

Stuck now so long

We just got the start wrong

No more last place

You better get your story straight

You can stop this, and I must insist

That you haven't had enough

You haven't had enough


Don't you need it? Don't you want this at all?

(testing, testing, Im just suggesting)

Don't you need it? Don't you want this at all?

(testing, testing, Im just suggesting)


Ah!


Stuck now so long

We just got the start wrong

One more last try, Ima get the ending

You can stop this, and I must insist

(testing, testing)

You haven't had enough

You haven't had enough

Stuck now so long

We just got the start wrong

No more last place

You better get your story straight

You can stop this

(don't you need it, dont you want this at all)

And I must insist

That you haven't had enough

You haven't had enough


Testing, testing, I'm just suggesting,

You and I might just be the best thing.

Marianas Trench 3집 'Ever After' (201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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