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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Jan 21. 2024

1980년 어느 날에 부치는 편지

딸들의 굴레는 왜 그대로인가



[1980년 어느 날에 부치는 편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내 살에 품어 세상에 내어놓았다. 너는 나와 다름없으며 나와 같은 피와 살이다. 나의 분신인 내 딸아, 부디 네가 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며 너에게 이 편지를 남긴다. 이는 모자란 내 자신과 사회에게 부치는 원망의 편지이기도 하다.


오늘 너를 낳은 이 어미는 고작 스무 살이다. 어미는 열다섯에 구로공단에 나이를 속이고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까닭이다. 일은 쉬웠지만 삶은 고달팠다. 공순이에게 밥을 먹을 짬이나 화장실에 갈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24시간 중 18시간을 어둑한 공장 불빛 아래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오르내리며 서 있어야 한다. 기계가 쿨럭거리는 틈을 타 주먹밥을 입에 우겨놓고 오줌보가 터질까봐 기저귀를 차고 자리에 서는 이들도 있다.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노동 환경 개선하라 울부짖으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른지 10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이 없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무심하더구나. 공장장은 아픈 공순이들을 기계 부속 교체하듯 새 공순이로 바꾼다. 때문에 아파도 아픈 척 할 수 없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의 처녀들이 그렇게 일 하는 곳이 이곳 공단이다.


초롱초롱한 네 눈을 바라 보며 나는 무한한 감동에 젖는다. 솜털이 가득한 네 볼살을 쓰다듬으며 내 삶에 동정 아닌 감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현실은 각박하구나. 네 아비와 미래를 약속하고 너를 낳았지만 결혼식은 요원하다. 겨우 버는 돈으로 방 한 칸 얻기가 힘이 들고 먹이고 입힐 것도 걱정이다. 곧 너를 옆집에 맡기고 다시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 나의 마음은 찢어진다. 나는 그저 네가 공부하고 또 공부해 나같은 공순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장의 부속품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또 어둔 공장 속으로 몸을 들이밀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부디 잘 자라다오. 오늘 힘겹게 너를 낳은 이 어미의 바람은 이러하다.


아비가 너를 참 어여뻐 한다.



[2023년에 보내는 답신]


엄마, 하늘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지요?


오늘도 엄마가 쓴 이 편지를 닳도록 읽어봅니다. 엄마가 제게 주셨던 사랑을 기억하며, 부칠 수 없는 답신으로나마 그리움을 달래려고 합니다.


오늘도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엄마딸 역시 공순이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바람대로 공장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사실 공부는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고이 키우셨지만 삐뚤어지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밤늦게 들어오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하지만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엄마와 똑같이 스무살에 귀한 딸을 얻게 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엄마는 엄마가 아닌, 할머니가 되었네요.


엄마 손녀 윤아는 오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의 첫발을 딛었습니다. 대학교 입학식에 딸아이와 손을 잡고 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정식으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어린 저를 보며 웃음 짓던 엄마의 얼굴이 꼭 윤아 얼굴 같았을까요. 아이들을 그저 각기 가장 아름다운 그 모습대로 키워내고 싶다는 게 딸아이 바람입니다. 저는 부디 선생으로서 윤아가 세상 풍파나 갑질을 겪지 않고 살아내길 바랄뿐입니다.


오늘 문득 가족은 하나의 퍼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어긋나버린 가족 퍼즐이 남편으로, 딸들로 조각조각 채워져 완성된 느낌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너무 소중하게… 세상의 각박함 속에 이 조각들을 가만히 품으며 오늘을 버텨봅니다.


엄마, 오늘도 무사히.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상상력에 기초해 직접 쓴 소설 중 일부입니다.

유명을 달리하신 서이초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교권을 위한 법적, 사회적 움직임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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