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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Aug 13. 2021

성실한 연기자로 사는 시간

대체 진짜 삶은 어디있는거야

고객님들은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들을 했다.


"이 프로젝트를 저 여자 대리가 할 수 있겠어?"

"우리 회사는 마감 때 밤샘 하는데 여자가 할 수 있나?"


네네. 할 수 있습니다.

는 웬만한 남자보다 나아요.

저를 성별로 구분하지 마세요.


그런 말에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 정체성은 아니었다. 일을 하는 것과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때였다. 나는 어떤 남자보다 남성적으로 일을 했다. 다시 말해 소위 명예 남성으로 살아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래도 나 직장생활을 좀 잘하는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어떤 남자 후배는 칭찬이라며 남자들 몇 명이 함께 있는 단톡방을 보여주었다.

" ○○ 선배와 □□ 선배는 일 안 하고 짜증만 내는 다른 여자 선배들과는 달라.  배울 게 있어."

나는 배울 게 있는 선배에 속해 있었다.  "짜증만 내는 여자"라는 표현이 거슬렸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여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기를 쓰고 열심히 했다. 자발적으로  밤 10시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트장이  "너 이거 좀 해볼래?"라고 할 때 " 네. 제가 한번  해볼게요"라고 대답하던 시절이었다. 학창 시절 좋은 성적이 나의 정체성이었던 것처럼 '쟤는 일을 좀 잘하는 쓸만한 녀석이야"라는 평판을 정체성으로 삼고 싶었다.  


나는 ERP설루션을 유지 보수하는 일을 ( 신입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하는데,  사실 이미 완성된 제품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IT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Business process를 시스템에 담아내는 설루션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배운 지식(회계학)이 영 쓸모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현업의 언어로 회의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설루션의 지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인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 글로벌 설루션을 잘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재미도 있었다. 찾아보고 알아보고 공부해서 고객님이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과정에 약간의 보람도 있었다.  ( 그리고 열심히 일하던 몇 년간의 실력과 평판 덕분에 지금까지 무난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 육아휴직 후 복직할 때  폭탄 던지기처럼 여러 파트에서 받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런 인력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개인적 평판과는 별개로 아이러니하게  업무 성과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조직에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조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조직의 필요란 KPI( Key Performance Indicator) 즉, 핵심 성과 지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과 지표의 구체적인 내용은 매년 달라지지만 우리 팀의 경우 재무목표/과제 수행/조직문화 기여 세 가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쉽게 이야기하면 매출에 크게 기여하던지 ( 여기서 핵심은 목표 이상의 매출이다.) 윗사람이 더 윗사람에게 들고 가 칭찬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던지 또는 팀원들이 회사에 애정과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독력 하는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 정치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맥락은 이런 거다.  성과 지표에 연계되는 일은 아니지만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일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조직이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평가 지표로 삼을 수는 없다.  지난해와 같은 정도의 매출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누군가는 해야,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이 새로운 기회를 도모하여 신규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정치에 능한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기회를 잘 포착하여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곤 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조직의 생리일뿐이다.


일을 정말 열심히 하던 시절의 나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게 그저 재미있었을 뿐 강약 조절 같은 건 할 줄 몰랐다.  평가에 크게 반영되지도 않은 일을 혼자서 열심히 해놓고 연말 평가를 받아 들고서 좀 의아해했던 순간들이 꽤 있었다. 한참을 더 직장생활을 하고 나서야 나는  '조직에서 일을 잘한다'라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을 알고 나니, 의아해하던 시절의 내가 귀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또 재미있는 건, 개인이 눈치껏 정치를 잘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이 조직에서 성공(승진/임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대리 시절 딱 한번 평가를 A 받았던 적이 있었다. 매일 10시까지 일하던 나에게 고객사 팀장님은 "아이고 사람을 더 뽑아야겠네!  ㅁㅁ대리 혼자 너무 힘들어 보여!" 라며 다음 해 인력을 늘려주었다.  돈 안 쓰기로 유명한 고객이었던 터라 추가 업무량을 받아낸 공을 인정받아 평가를 잘 받았었다. 그러나 과연 내가 매일 야근을 했기 때문에 고객사에서 선심을 쓰듯 추가 계약을 진행했던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고객사의 장기플랜(사업 확장)에 따라 필요한 인력 충원이었다. 다만 내가 개고생 하며 야근을 해대는 퍼포먼스를 보이지 않았더라면(순수하게 그때 공부하며 일하는 게 재미있었다!) 고객사는 인력 충원을 하는데 좀 더 고민을 했을 것이고,  팀에서는 인력 충원을 나의 성과로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차이 정도.  직장생활의 좋은 평가란 대게 그런 것이다.  시기, 소위 아다리가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




그때의 나는 주중에는 야근을 하거나 술을 마셨고 주말에는 악기를 배우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곤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마음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날들이 많았다. 회사에 나를 팔고 대신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을 받았다. 그 숫자들로 누리는 것들이 늘어남에 따라 마음 한편에 불안함이 더 커졌다. 자랄 때 보다 여유로워진 일상이 좋으면서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다. 월급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사라질 신기루 같은 즐거움이었다. 회사 상담실을 찾아가서 심리검사도 하고 상담을 받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삶을 대하는 내 태도의 문제였으니까.


고민을 하면서도 소비는 계속되었다. 그즈음 내 인생의 가장 큰 소비, 자차를 구매했다.  

사실 '운전하는 나'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차를 산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차는 부자들만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언니가 운전을 하기 시작해서 미쳤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집에서 유일하게 운전을 하던 언니가 시집을 갈 때 즈음 나도 그 미친 짓을 해보고 싶었다. 장롱면허가 10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음에도 호기롭게 통장을 털어 일시불로 차를 샀다.  남자 친구에게 부탁해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가져다 놓고 나서 운전 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홀린 사람처럼 운전을 했다.  운전하는 나는 멋있었고 (자뻑),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나만의 공간(운전석)은 따뜻했다. (엉뜨 짱, 훗)  잠실 야구장의 함성과 반짝이는 조명을 바라보며 짐짓 능숙한 척 운전을 해 퇴근하던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운전하는 내가 너무 좋은데 낯설었다.


나는 언제까지 회사에 나를 팔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나를 파는 것이 내 삶의 본질을 해치는 것은 아닐까?

나 아직 자아실현 같은 것 못했는데, 그냥  이렇게 인생을 낭비해도 되는 걸까?


그땐 그랬다. 이루어야 할 고정된 실체의 자아가 있고, 나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나는 '연극하는 자아'에 불과했다.  

좀 더 잘 기능하는 직장인이 될수록 조바심이 들었다.


진짜 삶은 환상적으로 스틱을 두드리는 드러머와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소설가,

미추를 꿰뚫는 예술가에게 있다고 믿던 때였다.


내 질문이 틀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 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 여기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차라리 그때 더 성실한 직장인이 되도록 마음먹는 편이 더 진짜를 사는 길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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