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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ul 18. 2022

흔들리는 규범 속에서 네 주체성이 느껴진 거야~

<22년 트러블 상반기 에세이 3>



<트러블>에서 주디스 버틀러를 4주 동안 읽고 마무리로 각자 한 편의 메시지를 썼습니다. 저는 수행성과 그 전복성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개념을 바탕으로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0. 일상 속의 젠더 수행 경험

지난 주말 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주말 내 장례식장을 지키고 발인까지 보고 나서야 상복을 벗을 수 있었다. 회사 경조휴가 항목에 시할머니 상은 없다. 만일 장례식이 평일이었다면 연차휴가를 내고 장례식장을 지켰을까? 아니면 손님처럼 잠시 방문했을까? 예전에 이 문제로 시어머니와 상의했을 때 굳이 개인 휴가를 내지 말라하셨고, 그런 생각의 연장으로 내 몫의 상복은 빌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장례식장에 갔더니 집안의 어른들이 왜 이 집 손주 며느리와 손녀들은 상복을 안 입혔냐고 한 마디씩 하시고, 나 스스로도  손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게 상복을 빌려 입었다.

   아무도 나에게 그곳에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상복을 입고 왜 그곳에 앉아있었을까? 고인을 애도하거나 혹은 꼭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렸을 적 경험했던 장례식 풍경이 떠올랐다. 그땐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상갓집을 알리는 표식이 아파트 창문에 걸리고, 건물  앞 공간에는 천막과 돗자리가 쳐졌었다. 장례를 치르는 집에서 우리 집 큰 상을 빌려가기도 했고, 엄마가 상갓집에 가서 음식 하는 걸 돕기도 했다. 그런 시절의 손주 며느리였다면 아마도 허리 필 틈도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요즘은 장례식도 결혼식처럼 상품화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몸으로 해야 하는 노동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더 애매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남편은 장손이라 나이 드신 아버님을 대신해 장례를 주관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아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곳을 지키는 게 맞다.  그러나 정말 나는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게 다 주디스 버틀러 때문이다. 그의 수행성 개념을 알지 못했더라면  장손의 아내인 나는 장례식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나를 그곳에 있게 하는 그 권력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나를 그곳에 앉아있도록 하는 것,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그 담론, 규율, 권력의 실체는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수행하려던 것일까?


1. 버틀러의 주체 그리고 젠더 수행성 

버틀러는 내가 생각하는 '주체, 자율성, 본질'과 같은 개념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데카르트 이후로 쭉 이어진 근대철학의 근간이 되는 개념들이다. 나는 인간은 본질적이고 불변하며 고정된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했고, 주체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환경이 바로 나의 적이자 고난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버틀러는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런 주체는 없다고.  버틀러에 따르면  시시각각 다르게 구성되는 개인은 매 시간 주어진 역할과 상황(역사성, 시간성, 고강성, 지리적이며 정치적인 맥락)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구현한다. (젠더 허물기-98쪽)  정체성이란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사회가 이상화하고 내면화한 규범이며 반복적으로 수행되어 몸에 (재)각인되는 행위에 불과하다. 버틀러의 정체성 논의에 따르면 행위 뒤에 행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그리고 행위 속에서 행위자는 가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행위자는 그 행위의 반복적 수행을 통해 구성되므로, 그가 말하는 주체는 담론적 구성물이다(젠더 틀러블 옮긴이 해제 - 23)

특별히 함께 망자를 애도하고 싶었던 것도 아님에도 장례식장을 지켰던 이유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도리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에서 '손주며느리'에게 기대되는 행동에는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행동을 했다. 그러나 그 기대되는 모습은 본질적인 이데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집안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그날 한 행동들은 지금 이 시대,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에서 유자녀 기혼 여성에게 기대되는 행동, 사회의 규제적 관행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 

2. 규범에 안주한다는 것 

내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규범은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규범은 온갖 사회질서를 좌우하면서 그 질서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합리화 과정의 일부로 작동한다.(젠더 허물기-347쪽).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처음 배우는 것은 규칙이다.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정해진 공간에 앉아 정해진 행동을 한다. 정해진 시간에 점심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하교를 한다. 부모는 아이가 그 규율을 잘 익히고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규율과 법을 지키는 어른이 되고,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축이 된다. 나도 그렇게 자랐고 아이도 그렇게 키우고 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이미 정해진 것으로 받아들여 규범 안에 머물 때, 규범은 우리에게 '정상'이라는 표식을 부여하며 삶에 안정감을 선사한다.

버틀러는 우리가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즉 인정받을 수 있는 인정의 규범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고유한 존재로 지속되기란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의 지속성을 지탱하는 인정 규범 없이는 내가 지속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나와 관련된 가능성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수 있기 전의 어딘가에서 처음 생각해야 한다. 내 반영성은 사회적으로 매개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나에 선행하고 나를 초과하는 규범의 사회성에 기대지 않고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다. (젠더 허물기- 56쪽~57쪽)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규범 없이는 살 수 없다. 규범은 나를 있게 한다.  규범을 잘 따른 결과, 장례식이 다 끝나고 시부모님은 따로 전화를 주셔서 고생했고 고마웠다고 하셨다. 좀 웃긴 표현이지만 시댁의 다른 친척들과 구분되어 새롭게 시댁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정상적인 이성애 가족 안의 행복한 결론이다.

3. 규범에 저항한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만약 내가 장례식장에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집에 가버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보자면, 시부모님과 남편이 나에게 실망을 하고, 부부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댁 식구들과 있을 때 가끔씩 선 밖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아마도 그 선이 더 굵고 높게 쌓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규범에 저항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된다.  내가 '손주 며느리 역할'을 수행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그것을 알면서 안 하기는 어렵다. 이때 규범은 나를 제약하는 것이 된다. 

사고의 범위를 넓혀보자. 규범은 제약할 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는 지워버리기도 한다. 버틀러의 사상의 출발점은 성소수자로서 시회에서 비가시적으로 배제되는 자신을 설명하고자 함이었다. 규범 밖에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삶의 제약을 경험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존재의 인식 가능성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규범적 정상성'이 존재하는 이들을 '인식 가능성' 밖으로 몰아낸다.  따라서 우리가 규범 없이 살 수 없는 것도 맞지만. 규범을 지금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도 존재(젠더 허물기 326쪽)한다.  내 삶이 규범과 상충되어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은  손주며느리 역할 수행을 거부해서 시댁 식구들에게 욕먹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살기 위해 규범에 저항하는 역사는 사실 길고 길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흑인 해방운동, 프롤레타리아 혁명, 여성들의 선거권 운동, 식민지의 민족 해방운동  등이 바로  '백인/남성/서구/자본가' 중심의 규범에서 배제된 이들이 '인간'의 범주에 자신을 포함시켜달라는 외치는 저항의 사례들이다. 그렇다면  규범에 저항하는 것은 투쟁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투쟁을 해서 성공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흑인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흑인은 향한 차별은 여전하다.  여성은 선거권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2등 시민이다. 푸코는 권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혁명의 끝, 이상향은 없다. 버틀러는 이 지점을 파고들어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언급한다.  버틀러의 질문 중 하나가 페미니즘 정치학에 여성이라는 주체가 필요한가인데, 버틀러는 투쟁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존재를 배제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배제되는 것은 그 주체가 아닌 어떤 타자일 수도 있고, 또 나 자신의 다른 면일 수도 있다. 버틀러는 우리가 정체성의 정치 입장에서 주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사실상 환영적 구성물에 불가하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에게 이 환영적 구성물은 어느 정도 자신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재현하려는 구성물에서 소수적 위치를 차지한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그 정체성으로 구성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100쪽

 어떤 입장을 정하고 그 입장에서 옳음을 향해 투쟁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 복잡하고 또 인간들이 맺는 관계는 다면적이고 중첩되어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보편적인, 모두에게 언제나 합당한 절대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틀러가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그 권력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버틀러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해달라고 외치기보다는 성소수자를 비 체화시키는 권력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사상은 개인의 성 정체성을 넘어서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되었다.  규범의 옳고 그름을 보기 전에 규범의 경계를 만드는 권력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


4. 규범에 저항하는 새로운 방식  

-  수행성의 전복성을 위해 질문하며 미지성을 수용하기

버틀러는 본질적인 주체란 없다고 했다. 단지 우리는 행위자 agency일 뿐이다. 게다가 동일한 정체성의 정치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만으로 구성된 가짜들의 집합이란 얘기일까? 헷갈리면 안 된다. '본질적인' 주체가 없다는 것이  '주체'의 존재(가능성)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 있되, 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또한 언제나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사회에서 벗어난 순결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지배권력, 규제, 규범)의 호명에 응대하여 삶을 수행하는 나가 바로 버틀러가 말하는 '주체' 다(라고 이해했다.)

버틀러 사상의 탁월함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수행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가 가질 수 있는 전복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버틀러의 주체는 법의 일부를 내면화해 법의 호명에 응대한다. 그러나 호명과 응대는 반복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 응대 방식이 늘 같을 수는 없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49쪽) 버틀러의 주체는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 부문을 둠으로써 완전한 복종도, 완전한 저항도 아닌 복종을 하는 주체다. 즉 규범 속 주체의 몸은 규제 속에 몸의 틀을 잡고 몸에 규제를 가하는 동시에, 반복된 규제 복종 행위 속에 자기도 모르게 그 규제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반복된 법의 호명과 그에 대한 주체의 응대는 재의미화나 재발화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젠더는 패러디다 44~45쪽)

행위자의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규범과 규제가 기능하지만 동시에  수행의 전복성으로 규범과 규제는 허물어질 수 있다.  수행성이 전복성을 가지는 그 가능성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버틀러는 질문하기, 그러니까 비평적으로 질문하기를 요구한다. 비평적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은 "경계설정 행위 자체를 꼼꼼히 살피는 것(젠더 허물기 174쪽)"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조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하되 토대 자체의 열개와 파열(젠더 허물기 174쪽)을 겪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의 수행이 단순히 어제와 같은 반복적인 수행일 수 없다.

그리고 질문을 하다 보면 우리는 "그래서 답이 뭔데?"라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버틀러는  이에 대해 언제나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편성이라고 믿는 그것도 합의의 문제(젠더 허물기 301쪽)라고 보았다. 이 미지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을 것이다. 

5. 글을 마무리하며 

문제는 질문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내 정치적 신념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고, 내 정치적 신념에 의혹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정치적 신념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생각한다는 공포, 사실상 그 질문을 한다는 공포는 정치성을 방어하는 것으로 정당화된다.(젠더 허물기 286쪽) 그리고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불안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질문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상성 안에 머무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또한 쉽고 편한 것만은 아니다. 

버틀러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주체적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답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버틀러는 내가 찾고 싶은 정답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것이 믿을만한 것이고, 따라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그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질문을 해야 규범이 흔들린다. 

그 흔들리는 규범 속에서 미지성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다르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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