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트러블 상반기 에세이 2>
인간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는 그 탄생 이후 다른 모든 종을 물리치고 가장 최상위 포식자로 자리매김하며 지구를 자기 것 인양 굴며 살아왔다. 그 과정은 도전과 정복,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무자비한 폭력의 시간이었다. 그 행동의 주체는 언제나 남자였다. 처음에 여자는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으로 전쟁에 정글 속의 기여할 능력이 부족했고, 역사 시대가 시작된 이후 성립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생명을 잉태하고 돌봄을 경험하는 여자가 팽창을 목적으로 하는 남자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같다. 여자들도 주체로 살고 싶었겠지만 여자가 수행하는 일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이미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후였고, 남자는 여자에게 그 규칙을 알려주지도 않고, 여자를 위해 그 규칙을 바꾸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네가 불편하면 네가 규칙을 바꿔보던가.'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권력을 가진 쪽의 속성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자는 여기에 "그래 내가 바꿀게"라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경제적 안정을 선택한 적도 있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은 적도 있고, 거대한 가스 라이팅으로 말할 엄두도 못 냈던 적도 있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의 역사다. ( 제2의 성 역사 파트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여자는 결과적으로 '열등하게 되었다'.
인간의 역사에 근대 최고의 발명품은 '이성'이라는 개념이다. 중세까지는 가문이나 핏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에게 자리(소명)를 정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을 했을 때부터 '나(I)'라는 존재가 사람들 마음속에 콕하고 박혔다. 누구라도 교육을 받는다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해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면성', '자아', '자율성' 같은 개념이 생겨났다. 인간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편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측면에서 개별적인 존재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 각자의 내면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인간에 여자의 자리는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백인 남성들에 의해서 발명되고 널리 퍼졌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세계에 대한 더 큰 탐험심으로 배를 타고 전 지구를 누비며 다른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며 자유를 누렸다. 제국주의적 행동들은 그동안 남자들이 자연의 위협에 맞서 문명을 발전시켜왔던 패턴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칼날이 자연에서 다른 인간들에게로 바뀌어서 겨누어졌을 뿐. 호주 땅에 도착한 인간들이 매머드를 모두 멸종시켰던 것처럼, 같이 살던 여자들도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기고 타자로 예속시키려고만 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대륙에 도착한 백인 남성들은 원주민들을 동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노예로 이용했다.
이와 별개로 근대가 되면서 여성의 조건이 변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남자가 가진 힘이 전부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해지면서 여자도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독립할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더 이상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어찌할 수 없는 질곡이 되지 않을 수 있는 피임, 낙태, 인공 수정 등의 기술이 발달했다. 보부아르에 따르면 인간이라면 초월하고자 하는 무한한 욕구로써 자신의 존재를 경험한다. 여자를 그 자리에 머물게 했던 삶의 조건이 변하고 동시에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고 평등하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여자에게도 도달하면서 여자들이 그동안 내던 목소리에 조금씩 더 힘이 실렸다. 주체로 살고자 하는 여자들이 목소리가 식민지 국민과 흑인 노예의 목소리에 더해져 세상에 터져 나왔다. 그 힘으로 참정권 투쟁으로 시작된 제1물결 페미니즘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제4물결 페미니즘까지 왔다.
그렇다면 지금 여자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알겠지만 일단 답은 "아니다."이다. 참정권을 가졌지만 그리고 남자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교육을 받지만, 원한다면 직장 생활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여자다움'의 굴레는 아직 여자들을 아찔한 계곡의 밑바닥으로 매일매일 굴려서 떨어드린다. (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평등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의 삶을 증명하는 책은 많다. 예를 들어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by 앨리 러셀 훅 실드, 타임 푸어(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 by 브리짓 슐트, 커리어 그리고 가정 by 클라우디아 골딘, 기획된 가족 by 조주은)
1949년에 보부아르는 제2의 성 결론 부분에서 "평등 속의 (남녀 간의) 차이"가 인정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21세기가 된 지금도 세상의 규칙은 여전히 근대 백인 남성들이 구축해놓은 이성 중심의 이분법적 사회 그대로다. 인간의 의식 안에 다른 모든 의식에 대한 근본적이 적대감이 있다는 헤겔의 사고방식에서 우리 사회는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승자 독식이고, 약육강식이며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규칙이 여전히 잘 먹히는 사회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아무리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해도 여자는 거기에 가닿지 못한다. 질문을 하고 투쟁을 하고 남자가 지정해놓은 타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전히 제자리 같은 느낌이다. 여자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윤리학을 이야기했다. 사르트의 실존주의에는 윤리학이 없다. 기투와 초월의 결과가 타자에 대한 억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자유를 행했다는 그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자유롭고자 애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자라면 다른 사람(타자)의 자유도 소중히 여기고 자유를 윤리적으로 행사하는 방향으로 행사해야 한다.(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by 케이트 커크패트릭) 이러한 실존주의 윤리학이 공동체에서 살아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를 향한 태도가 아닐까?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 최고의 성취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기 지신을 체득할 수 있지만... 자유들 간의 이러한 상호 인정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우정과 관대함은 쉬운 덕목이 아니다는 것을(제2의 성 224쪽)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실존주의 윤리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성적이라는 그 사고는 자본주의와 만나 탐욕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들을 짓밟고 안도의 한 숨을 쉬거나 깊고 긴 패배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 외에는 다른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비단 남자와 여자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그런 식이다. 그러나 지배와 복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역사를 주도해온 남자가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여자는 이 게임의 룰은 그대로 둔 채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대우 해달 라거나 혹은 남자와 다른 여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등하게 대해달라고 요구해왔다. 남자를 향해서.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남자는 당연히 듣지 않았다. 앞서서 말했지만 이미 주체를 선점한 자가 타자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실존주의 윤리학이 공허한 구호나 외침이 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태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선결 조건이 필요할까?
타자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제한하는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여자의 입장에서 이 쉽지 않은 길을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할까?
제2의 성을 읽고 나서 더 혼란스러웠다. 억압자에게 나도 인정해달라고 외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었다. 오드리 로드는 <제2의 성> 30주년 기념 학술 대회에서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목적은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비판이다.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가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태도와 감정 행동들이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동일함을 지적하며 남자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고(주인의 도구)해서는 성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다고(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남자와 동일한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여성들 간이 차이를 역량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기. 그 다른 방식은 바로 차이의 역량.
기존의 사고에서 '차이'는 위계의 이유가 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차이, 백인과 흑인의 차이, 유럽인과 아시안(오리엔탈리즘)인의 차이 등이 한쪽이 한쪽을 억압하고 이용하고 착취하는 이유가 되었다. 오드리 로드는 이러한 사고 자체를 흔들어버리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차이는 그저 다름일 수 있다. 나와 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항상 다르다. 차이가 역량이 되기 위해서 이 다름을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김은주 선생님(특강을 해주셨음)에 따르면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으로는 차이가 공동체의 역량이 될 수 없다. "나는 우리나라에 있는 이주 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해. 그들도 당연히 의료보험에 가입을 해서 혜택을 받아야 하고, 그들에게도 투표권을 주어야 해. 그리고 이제 우리도 난민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 그리고 나는 말이야 한부모 가정도 편견을 가지고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 각자의 삶의 선택일 뿐 내가 가치판단을 할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을 한다고 한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말 이주 노동자, 난민, 한부모 가정에 대해 나와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이미 위계가 있다. 내 이런 발언은 정치적 올바름을 장착한 시민이고자 하는 나의 욕망의 한 부분일 뿐 차이를 그저 다름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이미 위계를 가정한 사고에 익숙하다. 사회를 향해 성차별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그러니 나를 타자로 대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다른 관계에서는 내가 고정된 주체로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타자로 놓는다. 내가 사회의 타자를 대하는 방식은 남자들이 "나도 페미니스트야. 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그래도 선은 넘지 말아야 하지 않겠니?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고, 집안일은 여자가 더 잘하잖아.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역량이 되기 위해 내가 가져야 할 태도는 뭘까?
내가 세상을 향해 남자와 같은 주체가 되겠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항상 누구나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모두가 언제나 어떤 측면에서는 타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주체로서 타자를 환대'만' 하는 입장이 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서로가 가진 입장의 차이를 이해하고 (위계가 아닌) 차이를 가진 우리가 공동체 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관계의 상상력은 차이를 그저 차이로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발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차이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에너지, 역량이 될 수 있다.
오드리 로드가 이야기하는 '차이의 역량'과 보부아르가 말한 '실존주의 윤리'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의 역량이 다름이 위계가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이 역량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내가 나의 초월을 위해 기부를 하는 과정 해서 선택하는 그 행동이 공동체 내의 타인의 삶을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과 부름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실존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꼭 들어맞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부아르가 이야기했던 실존주의 윤리에 따라 사는 방법을 오드리 로드가 제시한 삶의 방식을 따라가며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드리 로드는 차이가 역량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은 타인이 정의한 내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성, 논리, 합리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어둡고 불길하고 비합리적인 영역이라고 치부되던 감정의 힘을 되찾아야 한다. 오드리 로드는 이것을 '성애'라고 표현했다. 성애가 지금 우리에게는 섹스, 성관계, 섹슈얼리티와 같은 의미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에로틱이고 삶의 추동이며 리비도이다.
"자기 자신과 온전히 연결되는 경험을 나누는 것은 내가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기쁨을 표현하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살아있음을 되새겨 준다. 내가 기뻐할 수 있음을 깊이 깨달을 때, 나는 이런 만족감을, 결혼이나 신이 나 내세 같은 것을 통하지 않고서도, 내 삶의 모든 측면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우리의 성애적 앎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을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렌즈가 되어, 그것들이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해 상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직하게 평가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 시스터 아웃사이더 75~76쪽
오드리 로드는 우리가 우리 밖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려 하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진 명령을 따르지 않고, 외부의 제약을 거부하고 내 삶을 온전히 느낄 때, 그리고 그 감정에서 나오는 힘을 서로 공유할 때 강력하고 창조적인 힘을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남자를 향해 나 좀 인정해달라고 이야기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차이가 역량이 될 수 있도록 '성애'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정규 교육 과정은 근대에 형성된 방식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모른다. 우리가 우리가 느끼는 것, 가슴속 깊이 소용돌이쳐 올라오는 감정을 믿으려고 할 때 내 안의 강력한 초자아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너 어쩌려고 그래....". 그 속삭임은 너무 강력해서 나를 두렵게 만들고 순응하게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사회가 심어놓은 내면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대답해보려고 한다.
"잘 살아보려고 그래...."라고.